[매일춘추] 연탄난로

입력 2013-01-09 07:19:46

겨울바람이 칼날같이 차가운 날 가까운 화가 몇 명이 새해 인사를 나누며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한 후배의 화실에 모였다.

이젤 위에는 작업 중인 작품이 얹혀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화구와 재료들, 아직 작가의 혼을 담아내지 못하고 벽면에 기대어 있는 하얀 캔버스. 친숙한 광경이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연탄난로가 유독 시선을 멈추게 한다. 난로 위에는 낡은 주전자가 뜨거운 콧바람을 식식거리며 덜거덕거리는 가습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옆 양철통에는 미처 버리지 못한 연탄재 두 장과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연탄 두 장이 정겹게 키를 나란히 하면서 머리에는 날카로운 연탄집게를 삐딱하게 꽂은 채로 담겨 있다.

겨울나기를 지혜롭게 준비한 후배의 화실을 뒤로하고 꼬치구이 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연탄난로와 함께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연탄난로는 서민들에게 훌륭한 난방 도구였다. 화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다수 가난한 젊은 화가들은 추위가 오기 전에 연탄난로를 설치하기 위해 서로 품앗이를 하기도 했다. 물론 혼자서도 가능했지만 이 일을 핑계로 막걸리 잔을 나누기 위한 마음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쓰던 낡은 난로가 대다수였으며 설치 중에 실수로 연통이 찌그러지기라도 하면 난감했다. 난로 설치가 끝나고 나면 겨울 동안 사용할 연탄을 구입해 화실로 직접 옮겨 돈을 아껴야 했다. 화실 구석에 사람 키 높이만큼 아슬아슬 줄지어 쌓여 있는 연탄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화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낡은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젊음과 가능성 하나로 버티던 그때는 연탄난로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어쩌다 새 연탄으로 연탄불을 갈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 냉기에 잠이 깨는 날이면 몸을 쪼그리고 캔버스에 붓질을 하면서 아침 햇살을 기다렸다. 연탄난로는 난방의 기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간식을 위해 얹어둔 고구마를 다 태우기도 했으며 물이 가득 담긴 큰 주전자는 항상 난로 위에 얹어져 있다가 식사 때가 되면 음식을 끓이는 냄비와 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한 봉지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려는데 예상치 못한 객들이 찾아오면 젓가락 대신 거꾸로 잡은 붓으로 라면을 건져 배고픔을 나누었다. 어쩌다가 그 객들에 의해 난로 위에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는 김치찌개가 얹어지고 막걸리 몇 통이라도 생기는 운수 좋은 날 밤이면 막걸리 잔을 돌리며 인생과 예술을 서로 처절하게 토하다가 누군가의 기타 반주와 젓가락 장단에 노래판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연탄난로를 안고 막걸리 한잔에 인생과 예술을 담아 마시며 긴 겨울밤을 같이한 그들이 그리운 오늘, 이제 마지막 건배!

김윤종<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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