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데…" 왕년 타령과 은퇴하라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20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90세의 수명을 누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인생 100세 시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나 긴 수명은 축복이기보다는 오히려 '오래 살 위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명은 길어진 반면 한국인의 정년 나이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말 고용노동부가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자를 조사한 결과 정년퇴직 연령이 57.3세였다. 그러나 체감정년퇴직 연령은 공기업이 52.2세 대기업이 47.8세로 조사돼 근로자가 느끼는 정년 체감 나이는 실제보다 훨씬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살기
"나이가 들고 은퇴하니 사람이 달라져요, 종전 같으면 그냥 넘길 일인데도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부터 들어요. 심지어 마누라의 눈길도 자식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자격지심이랄까. 내가 바뀐 건지 주위 사람들이 바뀐 건지."
은퇴한 전직 최고경영자의 이야기다. 이처럼 은퇴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은퇴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불행한 순간이며, 노후생활비는 물론 자녀교육비나 결혼비용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월급과 일자리가 사라져 버리는 '충격적인' 현실로 여겨진다.
한 외국은행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은퇴라면 경제적인 어려움, 외로움, 지루함,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프랑스'영국인들에게 은퇴는 자유와 행복을 주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그들은 은퇴를 나만의 속도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응답했다.(표1)
곽호순 정신건강과 전문의는 "은퇴는 말 그대로 Re-tire다.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새로운 인생의 대장정을 떠나는 인생 2막의 출발점이다. 여생을 보낸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은퇴는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장하는 가슴 설레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은퇴 후의 시간들을 인생 전반부의 깨진 균형을 수리하고 보완하는 귀한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또 이런저런 이유로 접어두었던 꿈을 실현시킬 또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은퇴는 부정의 단어가 아니라 희망의 단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너무 많은 시간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돈만 있으면 노후준비는 '끝'이라고 생각한다. 100세 시대 은퇴자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은 정작 돈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많은 시간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퇴 후 삶을 30년이라고 가정해보자. 하루 24시간 중 13시간을 잠자고 식사하고 운동하고 신문과 TV 보고 친구와 만나며 시간을 소비한다 해도 하루 11시간이 남는다. 이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무려 12만 시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2008년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 라이어'에서 어느 한 분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은퇴 후 무려 12만 시간이면 12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국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99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간했다. 그녀는 9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최근 인터넷에 '95세 할아버지의 후회'라는 글이 인기다. 그는 65세에 당당히 은퇴했으나 그 후 30년 세월을 죽음만 기다리며 하릴없이 보냈다. 95세 생일을 맞은 이 할아버지는 헛되이 보낸 30년을 아프게 후회하며 이제 어학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105세 생일에 더 이상의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노후 자금 계산 좀 그만하자!
돈이 있으면 노후는 걱정 없을까? 또 행복할까?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은퇴하면 바로 노후자금을 이야기하는데 노후자금 계산 좀 하지 말자. 없는 돈 계산하면 나오나. 물론 돈이 있으면 인생이 더 행복하겠지만 없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돈이 있든 없든 즐겁고 행복하게 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면서 '노후자금 10억원'이라는 금융기관의 공포 마케팅에 휘둘리거나 주눅 들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은퇴자들의 모임인 한국은퇴자협회는 일부 금융기관의 '은퇴자금 10억원'이라는 주장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10억원 은퇴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은 고소득자들이며 아직 은퇴를 경험해보지 않은 금융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미리 은퇴자금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런 얘기들이 자칫 돈이 은퇴 준비의 전부라는 생각을 심어줄까 걱정이라는 설명이다.(표2)
가장 좋은 노후의 경제대책은 '평생 일을 가지는 것'이라는데 모두가 의견을 같이한다. 작은 수입이라도 고정적으로 나오는 그런 일자리 준비가 가장 좋은 노후대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철저한 건강관리 역시 노후경제대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왕년에~'는 잊어라
대기업 상무를 했던 아파트 경비원 이모 씨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아파트 경비를 하느냐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처음 이 일을 추천받았을 때 도저히 하겠다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3년이 지나고서야 경비원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체면과 남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야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고 그만큼 가능성도 열려 있음을 강조한다.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들은 행복한 은퇴자가 되려면 타이틀이나 주변의 도움 없는 '발가벗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문한다. 발가벗은 힘이란 지위나 일시적인 상황이 만들어준 힘이 아닌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순수한 힘을 말한다. 이 힘을 빨리 기르면 기를수록 멋진 노후를 보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은퇴하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으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신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추고 현실 속에서 소박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때로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또 주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행복한 노후를 보장해주는 열쇠다.
100세 시대 은퇴 패러다임은 일과 삶의 균형지점에서 평생 동안 배우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건강하게 일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가 역시 경력처럼 관리해 평생 즐길 여가활동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정부차원에서 돌봄이 아닌 자립과 참여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와 공생하는 길이 제공돼야 하며 또 평생 교육을 통해 생산적인 고령화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수영 서울대교수(행정대학원)는 "100세 시대는 단순히 고령화와 복지정책이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생애 전 주기를 포괄하는 새로운 기준(New Normal Standard)의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은퇴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책도 복지도 돈도 주변 환경도 아닌 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실행하려는 의지라는 데 이견이 없다. 감을 따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행복한 은퇴자가 되기 위한 시작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 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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