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이청준 전집 '눈길'

입력 2012-12-29 08:00:00

이청준 전집 '눈길'/이청준 지음/문학과 지성사 펴냄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등 대한민국 문학계의 굵직한 상을 휩쓴 소설가 이청준의 중'단편소설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라면 1만2천원이라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

이청준 중단편집 '눈길'은 20세기 단편 '눈길'을 비롯해 이청준이 가장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던 1977년과 1978년 무렵에 쓰고 발표된 8편의 중'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저자는 이 당시 소설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적 현실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개별자의 궤적을 잘 그려내고 있다.

'눈길'은 특별하다. 주인공은 참혹한 가난 속에서도 수치와 모멸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도시 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문제 삼는 단편 '거룩한 밤'과 '잔인한 도시'는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순응해 함몰되어가던 당시 사회 현실을 그리고 있다.

중'단편소설의 백미는 계속 이어진다. 삶의 불가사의에 대한 소설적 탐구를 담은 중편 '예언자'와 단편 '얼굴 없는 방문객'에서는 이청준의 문학세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이청준 특유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완벽과 비완벽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요구하는 '불 머금은 항아리'와 영화 '서편제'의 원작소설인 '소리의 빛-남도사람2'도 이 책에 실려 있다.

'소리의 빛'은 '남도 사람' 연작의 두 번째 이야기로 소리 세계의 독특한 공간인 판소리의 미학을 글의 세계로 훌륭하게 옮겨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래도록 한 맺힌 삶과 그리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의 물결을 마치 판소리 가락처럼 유장하고 처연한 문제로 완성해낸 이청준 문체 미학의 결정체로 볼 수 있다. 1979년에 발표된 '겨울 광장'도 이 전집에 포함됐다.

20세기 한국소설에서 이청준과 그의 소설이 차지하는 자리는 높고 크다. 성실성과 산문정신으로 일관된 그의 일생은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한국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역사의 변방에 잊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고, 방황하는 젊음의 고뇌 그리고 개인, 사회, 역사, 전통, 예술을 아우른다.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타난 그는 40여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2008월 7월 지병으로 하늘나라로 떠난 그의 문학세계에 한 번 빠져보자. 사후 이청준에게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421쪽, 1만2천원.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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