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온 외국인 내가 책임" 민간 홍보대사 뿌듯
"모르는 사람을 네 방에? 너무 위험하지 않아?"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 호스트를 한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했을 때 10명 중 8명은 나를 말렸다. 카우치 서핑 호스트는 전 세계 여행자(서퍼)들에게 무료로 잠잘 곳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33㎡(10평 남짓)의 원룸에 온라인으로 사진 몇 장 본 게 전부인 낯선 외국인을 들이다니. 나의 카우치 서핑은 "내 도시 대구를 찾는 여행자는 내가 책임진다"는 일종의 책임 의식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6개월간의 실험이 시작됐고 지금껏 스페인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이란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5명의 여행자가 내 소파를 거쳐 갔다. 공식 관광객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대구를 스스로 찾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이야기는 내 작은 소파에서 시작됐다.
◆"스페인보다 더워요"
2012년 5월 4일 동대구역. 광장에서 커다란 배낭을 멘 외국인 두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카우치 서핑 인생의 첫 손님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온 카를라(32'여'멕시코)와 야프(27'네덜란드)였다. 유럽에 갇힌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어 한국과 일본을 4개월간 도는 첫 아시아 여행을 계획한 이들. 카를라는 "대구에서 함께 지낼 호스트를 찾는다"는 글을 올렸고 나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 초대글을 보냈다. 미끼는 '약령시한방문화축제'. 대도시 한 가운데서 열리는 한방 축제가 신선해 보였는지 기꺼이 내 초대를 받아들였다.
신문사가 약령시 바로 옆에 있는 터라 퇴근길에 곧바로 이들을 불러 축제 현장으로 달려갔다. 한방에 관심이 많은 카를라는 한약 냄새를 맡고, 탕약에 설탕을 잔뜩 넣어 시원하게 원샷 했다. "멕시코에 있는 여동생에게 줘야겠다"며 탕약 봉지를 여러 개 사기도 했다.
문제는 '잠'이었다. '남자 서퍼는 함께 잘 수 없다'는 내 수칙 때문에 야프는 늦은 밤 동료 기자의 집으로 옮겨갔고 카를라는 가로 길이가 140㎝밖에 안 되는 소파에서 "딱 내 사이즈"라며 불편한 내색 없이 이틀간 발을 소파 밖으로 내놓고 잤다.
한번 엮인 인연은 쉽게 끊기지 않았다. 올해 7월 여행차 스페인을 찾았을 때 카를라가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4일간 작은 방 하나를 내게 제공했고 룸메이트 이다니아(26'여)는 바쁜 카를라를 대신해 매일 아침 식사를 챙겨줬다. 이틀간 작은 소파만 제공한 내게 과분한 대접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는 다시 대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야프는 "대구는 시내(동성로) 한 곳에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고 차를 타고 1~2시간만 가면 산과 바다로 연결된다. 바르셀로나도 좋지만 네 도시(대구)는 덥긴 해도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5월 초에 대구의 더위를 맛봤던 그는 "아보카도는 더운 곳에서 잘 자라니 대구에 가서 심으라"며 씩 웃으며 아보카도 씨앗을 손에 쥐어줬다.
◆아시아 첫 여행지, 대구
"유럽을 벗어나는 첫 여행, 대구로 갑니다."
지난달 이탈리아 볼자노(Bolzano)에서 날아온 카우치 요청을 받았다. 파니(33'여)는 자비를 들여 대구아트페어에 참석한 헝가리 출신의 아티스트였다. 첫 아시아 여행인데, 목적지가 대구라니. 파니는 "대구에 수많은 외국인 호스트가 있지만 너를 택한 것은 한국 사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만나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나는 여행자가 오면 항상 저녁을 같이 먹었다. 관계는 정성이 들어간 '밥'을 함께 먹을 때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음식 솜씨가 없어 손님이 오면 대형마트표 양념 불고기로 '한국 대표 음식'을 선보였지만, 이날은 미리 준비를 못 했다. 남아있는 재료는 스파게티면. 이탈리아에서 10년 넘게 산 파니에게 올리브 파스타를 만들어줬다. 외국인이 김치 만들어서 한국 사람에게 "먹어봐"라고 내미는 꼴이었지만 그녀는 "맛있다"며 한 그릇을 쓱싹 비웠다.
대구아트페어는 국내외 100여 개 화랑이 참여해 거장과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 축제였다. 파니는 매일 그곳을 찾아 작품을 감상했다. 그날 퇴근 뒤 파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갑작스런 '회식'이 잡혔다. 회식은 한국 직장 문화를 단시간에 체험할 수 있는 압축판이다. "파니, 같이 갈래?" 그녀는 그날 소주와 맥주가 뒤섞인 '폭탄주'를 연거푸 마신 뒤 잠깐 사경을 헤맸다. 침 묻은 잔까지 돌리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법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날, 파니가 말했다. "대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도시였는데 내 바람대로 많은 한국인을 만났어. 대구, 다시 찾을 거야."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에 없는 것들
카우치 서핑 사이트에는 추천(reference) 기능이 있다. 호스트와 서퍼, 서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남기는 것으로 인터넷 쇼핑으로 치면 '구매 후기'와 같다. 올해 8월, 사모네(26'여'이란)가 '대구에서 일주일간 지낼 호스트를 찾는다'는 글을 올렸고 그녀의 프로필 추천을 읽다가 내 친구 K양과 똑같은 이름을 발견했다. 세계여행 중이었던 K양은 페이스북에'이란 쉬라즈에서 카우치 서핑을 했다'는 글을 남겼는데 그때 호스트가 사모네였던 것! 경북대 전기공학부 석사 과정에 합격한 사모네. '이란은 불법이 많은 나라야. 공원처럼 공공장소에서 남녀가 데이트하는 것도 불법, 외국인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남의 집에 자는 것도, 페이스북마저 불법이야!' 사모네는 이런 갇힌 나라에서 카우치 서퍼들을 몰래 자신의 집에 초대한 용감한 여성이었다.
우리가 간과했던 일상이 이방인에게는 큰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간 곳은 백화점 8층에 있는 비빔밥집이었다. 오후 8시가 되자 전면 통유리 밖으로 대구 야경이 펼쳐졌고 사모네는 탄성을 외치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동성로에서 5천원짜리 봉지 칵테일을 마시면서 무슬림인 그녀는 알코올을 이날 하루 자신에게 허락했다.
대구를 처음 찾는 여행자들은 영어로 된 여행서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에 정보를 의존한다. 그 속에 대구는 팔공산만 있는 볼 것 없는 도시일 뿐 골목 투어도, 방천시장의 김광석 거리도, 대구와 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대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3곳도 아직 이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우리 집 두 번째 손님이었던 웬디(22'여'네덜란드)는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아시아 5개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웬디는 론리 플래닛을 버리고 내가 자주 가는 아시안 푸드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웬디는 대구에 5일간 머무르면서 경주 불국사와 합천 해인사를 여행했다. 그녀는 "경주에서 전날 해인사에서 만났던 프랑스인들을 또 만났다. 나와 똑같은 여행 책을 들고 같은 코스를 여행한다는 의미"라며 "내가 카우치 서핑을 하는 이유는 여행 책자에는 없지만 현지인들(local)이 보고 먹고 즐기는 그들의 일상을 체험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지금도 내 작은 소파는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열려 있다.
기획취재팀=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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