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모임 '감초' 당신의 건배사는
직장생활 1년차인 이정훈(32) 씨는 며칠 전 열린 회사 송년회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폭탄주가 몇 잔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갑자기 직장 상사가 건배사를 해보라는 주문을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머릿속이 하얘져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얼굴이 빨개진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평소 건배사를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선배 앞에서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었다.
연말연시 모임은 물론 동창회, 동호회, 직장회식이 잦아지면서 건배사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건배사를 했다가는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너무 경박하면 민망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축배를 든다'는 뜻의 건배가 경우에 따라서는 '악배'가 될 수도 있다.
◆건배사도 웰빙이 대세
모임의 성격에 어울리면서도 위트 넘치는 건배사는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물론 좌중을 휘어잡고 자신을 확실히 알릴 수 있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송년회를 건전하게 보내려는 분위기가 일다 보니 무조건 '먹고 죽자'는 식의 건배사 대신 따뜻하고 분위기 있는 건배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구경북연구원 오동욱 사회문화연구팀장은 며칠 전 대학동창회 부부동반 모임에서 건배사로 '사이다'를 외쳤다. 오 팀장은 "사랑합니다. 여보, 이 생명 다 바쳐서 다시 태어나도'라는 의미를 설명하자 아내의 따뜻한 눈길과 함께 부부 금실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에 질세라 함께했던 대구도시철도공사 사업개발팀 우승호 과장은 '오바마' 하고 외쳤다. '오직 바라보는 것은 마누라뿐'이라는 설명이 이어지자 모처럼의 부부동반 모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했다.
웰빙을 추구하며 술을 적당히 마시자는 문구로는 '원더걸스'(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 '초가집'(초지일관, 가자, 집으로), '일일구'(한가지 술로 일차까지만 하고 9시 전에 집에 가자) 등이 자주 애용된다.
모임에 지각하는 것을 방지하고 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돈나'(마지막에 오는 분이 돈 내고 나간다)라는 건배사도 나온다. 직장인들의 심정을 담은 '당신멋져'도 자주 사용된다.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는 뜻으로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삶의 여유를 주는 말로 활용되고 있다.
이 밖에 '너나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하여), '해당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등의 건배사는 송년회 분위기를 띄우는 데 제격이다.
선창과 후창 형식의 건배사도 여전히 인기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면 좌중이 일제히 '아니다'고 화답하는 형식이다. 반전이 있으면 금상첨화. '(누구를) 위하여' 하고 외치면 '난 반댈세' 하며 반전으로 끝을 맺는 방식도 있다. 김민지 스피치킴 대표는 "건배사는 모임의 종류와 성격, 장소 등에 맞는 건배사가 좋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건전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 3가지에 맞춰서 하면 모임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때그때 달라요
건배사에 시대가 처한 상황이나 세태 풍자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요즘처럼 정권이 바뀔 때는 건배사도 바뀐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서 '박근혜 친근해'라는 건배사나 '여행가자'(여성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공직사회의 송년회 건배사로는 '남행열차'가 최고 인기다. '남은 기간 행동 조심하고 열심히 눈치 보다 차기 정권까지 살아남자'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5년 전에는 어땠을까. 이명박 정권 때는 '저탄소'를 선창하면 자동적으로 '녹색성장'이 뒤따랐다. '4대강'을 선창하면 '살리자'가 따라붙었다. 참여정부에서는 주요 건배사 화두가 '혁신'개혁'이었다. 누가 '권위주의'를 외치면 '타파하자'는 후창이 뒤따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초기에는 'IMF'를 외치면 '극복하자'는 코멘트가 이어졌다.
또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로 도발을 해올 때는 '독도는' 하면 '우리땅'이라는 구호도 술자리에 자주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잘 묵고' 하면 '잘 살자'로 되받아 흥을 돋웠다고 한다. 이 구호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서 요즘 술자리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건배사의 영원한 바이블은 역시 '위하여'.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된다. 각기 속한 단체명의 앞자를 따서 '위하' 다음에 붙인다면 곧바로 건배사가 된다. 예를 들면 고려대 동문들은 '위하고', 연세대 동문들은 '위하세'라는 식이다. '위하여' 자체도 건배사가 된다. 위와 아래 모두를 위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알까기 시리즈'라는 책으로 건배사의 달인으로 불리는 윤선달 삼성와이즈 대표는 "건배사는 그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말들이 녹아 있다. 조금만 신경을 써서 준비하면 술자리마다 그때그때 맞는 분위기를 살려주고 서로의 마음을 터놓게 할 수 있는 분위기 메이커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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