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천재적 만능 음악인 김해송(상)

입력 2012-12-20 14:02:54

재기 발랄…뛰어난 작곡가이자 가수로 활동

김해송(金海松)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한국 가요사에서 작곡과 노래를 함께 겸했던 특이한 사람이 이따금 나타나곤 했었는데, 이 김해송이란 분이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문화인들은 그 나라 국민들 기억 속에 오래오래 기억이 되며 사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식민지와 분단의 혼란 속에서 험한 세월의 풍파에 그 존재가 망실되어 버린 인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김해송이란 이름이 여러분께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도 바로 한국전쟁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김해송! 그는 너무도 뛰어난 가요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가수로 활동했었고, 또한 한국의 뮤지컬 역사에서 선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의 품성은 항상 재기 발랄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11년 평남 개천에서 태어난 김해송은 본명이 김송규(金松奎)입니다. 소년 시절 평양 숭실전문을 다니다가 집안의 연고에 따라 충남 공주로 내려와 공주고보를 졸업했습니다. 재학 시절부터 기타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날이면 날마다 기타만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전문적 기타 연주자가 되고 싶은 꿈에 부풀어 김해송은 조선악극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목인을 찾아가 오케레코드사 전속 연주자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1935년은 김해송이 가수로 무대에 처음 데뷔한 해입니다. 당시 24세였던 김해송은 이난영, 신일선, 고복수 등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들과 함께 당당히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레코드로 만들어진 첫 작품 '항구의 서정'(남풍월 작사'김송규 작곡'김해송 노래, 오케 1920)이 발표된 것은 그해 10월의 일이지요. 이 노래도 김해송이 작곡과 노래를 직접 맡았습니다. 이후로도 '우리들은 젊은이' '청춘은 물결인가' '청춘해협' '청춘쌍곡선' 등의 노래를 작곡하고 노래를 직접 불렀습니다. 틈틈이 '김해송 신작 발표회'를 열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던 것은 물론이지요.

1937년 2월에는 최고의 음악가를 지향하는 청년 김해송에게 있어서 드디어 출세의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가요곡 '연락선은 떠난다'(박영호 작사'김송규 작곡'장세정 노래, 오케 1959)를 작곡하여, 평양 출신 가수 장세정으로 하여금 애처롭고 눈물겨운 음색으로 취입하도록 했던 것이 바로 그 기회였습니다. 이 노래에 대한 반향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유명 가수들의 대표작품을 추려서 '걸작집'이란 이름을 달아 발매하곤 했었는데, 가수 장세정의 최고 출세작이 되기도 했던 이 노래는 '장세정걸작집'이란 타이틀로 그 맨 첫 곡으로 수록되었습니다. 유명 변사였던 서상필이 넉살 좋게 엮어가는 사설이 듣기에 구수했습니다. 그 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대사) 여기는 항구, 추억의 보금자리/ 진정코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가는 그대여,/ 오! 내 얼굴엔 눈물이 퍼붓소이다,/ 잘 가시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이것은 선물이오니/ 변변치 못한 손수건이오나/ 이것으로 눈물을 씻어 주세요,/ 언제나 잊지 마시고 영원히, 영원히/ 고맙소이다, 안타까운 이별에 주고받는 선물이/ 내 장부의 가슴을 쥐어뜯는구려,/ 그대 성공하시어 조선의 디아나더빈이 되기를 바라오.

구성지게 엮어진 변사의 이런 대사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곧이어 전주곡과 함께 장세정의 애조 띤 음색으로 '연락선은 떠난다'가 흘러나옵니다. 뿌웅 하는 슬픈 뱃고동 소리도 잔잔한 배음으로 들려오는군요.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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