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안 제해권 장악한 대해상국가"…철·금동 제품

입력 2012-12-15 08:00:00

바다를 통해 일 열도에 수출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호남동부지역에 걸치는 넓은 권역을 형성하였다. 이제까지 대가야 발전의 배경에 대해서는 합천군 야로지역 일대 철산의 개발을 중심으로 설명되어 왔으나 필자는 국내의 자료만으로 그 과정과 배경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대가야의 영역확장 과정이 섬진강 수계를 지향하는 것과 5세기 중엽 이래 일본 열도 각지에 대가야 문물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는 가야의 중심국으로 성장해 4세기까지 일본 열도와의 교역을 주도해온 금관가야와 5세기 전반 이를 주도한 신라를 대신하여 일본 열도와의 교역을 장악해왔다. 5세기 후반 일본 열도의 이입문물 대부분이 대가야산이며, 이는 대가야가 남해안 진출에 따른 제해권의 장악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대가야가 남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한 후 남원분지로 남하하여 구례를 거쳐 섬진강하구의 교역항인 하동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제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여수, 순천, 광양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본다. 대가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아라가야와 소가야의 내륙회랑인 남강로뿐만 아니라 양 세력이 활동하던 남해안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와 왜의 교통뿐만 아니라 왜의 중국 교통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 설명할 수 없었던 4세기까지 이입되던 금관가야산 문물과 5세기 전반에 이입되던 신라산 문물 대신에 대가야산 문물이 5세기 후반 일본 열도에 유입되는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해권을 장악한 대가야는 종래의 금관가야와 신라를 대신하여 일본 열도와의 교역과 교섭을 주도하게 된다.

5세기 후반 일본 열도의 대가야문물은 4세기에 금관가야가 전해준 철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금제, 금동제 장신구, 금동제 마구를 포함하고 있어 양자 간 국가 경쟁력의 질적 차이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대가야는 당시 왜가 원했던 말과 그 사육 방법을 전해준 점, 더욱이 국가체제의 정비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문자의 사용을 본격화시킨 점에서 일본 열도의 문명화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가야는 종래 내륙의 후진국으로만 파악되어왔으나 내륙에서 생산한 철과 금, 금동제품을 바다를 통하여 일본 열도 전역에 수출한 대(大)해상교역 국가였다. 일본 열도의 대가야산 문물은 신라, 백제에 필적했던 5세기 후반 대가야의 사회발전단계와 국제 경쟁력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천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