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케냐로 갑니다. 아니 케냐로 떠납니다. 돌아올 걸 생각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세계로 무작정 '떠나는' 겁니다. 여행은 돌아오지 않는 거라지요. 우리네 삶 자체가 편도 여행이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사실입니까? 그래서 떠남은 늘 설렘의 깃발을 앞장세웁니다. 신발끈을 졸라매고, 배낭을 메고 케냐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 꾸역꾸역 살아내야 하는 일상은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하루, 또 하루를 꾸려가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세상과 주고받는 말들은 뜻을 머금지 못한 채 공중에서 휴지처럼 날아다니고, 내 안에서 나의 부재를 파먹으며 자라는 권태라는 짐승이 으르릉 거렸습니다. 혼자 묻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대답해야 하며 내딛는 순간들, 걸음이 닿는 곳마다 무한 자유의 너무나 환한 대낮이지만, 밝은 불빛만큼이나 더욱 무성해진 제 그림자가 맨땅에 드러누워 막무가내를 부려댔습니다.
이 대책 없는 시간들이 겨울의 밑바닥으로 침몰하여 얼어붙기 전에, 내 안의 타성과 망각을 깨뜨려 줄, 도끼 같은 책 한 권 만나고 싶었습니다. 묵정밭 같은 머릿속을 뒤엎어줄 삽날 같은 글 한 줄 찾고 싶었습니다. 뜨거운 국밥 같은 말을 나누며 서로의 가슴을 덥혀 줄 사람과 오랫동안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작은 사건이라도 하나 저질러 이웃들의 가슴으로 뜨거운 강물 한 줄기 흘려보내고 싶었습니다. 허나 모든 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자주 흥얼거리게 된 '고래사냥'의 노랫말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 하나 가득 슬픔 뿐'일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 모두가 돌아앉아 있다'는 절망감을 머플러처럼 목에 감고 지낼 때, 문득 케냐가 다가왔습니다. 당장 떠나오라고 손짓해왔습니다.
공항에는 늘, 알 수 없는 저 먼 곳에 대한 동경과 설렘이 짙은 안개처럼 떠돕니다. 내가 나에게서 가장 멀어질 수 있는 환각의 장소이지요. 무수한 유리문을 여닫으며 화살표를 따라 미로를 따라 흘러다니다 보면, 누구나 꿈을 좇아 맨발로 헤매는 유랑자가 됩니다. 우울과 권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 수 있습니다.
케냐 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제 상상의 발길은 또 그새를 못 참고 나이로비 공항을 빠져나가 케냐의 초원을 헤맵니다.
끝없는 평원 세렝게티. 광활한 초원에 이글이글 붉은 해가 막 솟아오르고. 태양의 지휘에 따라 대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일제히 연주를 시작하면, 싱그런 햇살의 음표들을 소낙비로 맞으며 온갖 초목과 동물들이 생기를 발동하겠지. 코끼리 무리 위로 붉은배찌르레기가 날아오르고, 누의 무리가 이동을 시작하겠지.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 야생의 식사를 하는 주위로 독수리 떼와 하이에나가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끝없이 펼쳐지는 초지 위로 양떼와 소떼를 몰고 가는 붉은 옷을 걸친 키가 큰 원주민들, 그들에 창끝에 반짝이는 햇살, 아, 눈부셔라.
지금쯤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아헤∼ 아헤∼ 아헤∼/얄얄랴 아야디에∼/아헤∼ 아헤∼ 아헤∼/얄얄랴 아야디에∼."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마사이 여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무르익어가던 축제 분위기가, 사내들의 출현으로 절정으로 치닫겠지. "빙간루 빙간루 어어차/빙간루 빙간루 어어차." 칼과 창을 높이 들고 고함을 지르며 마당에 들어서서 빙글빙글, 산천을 어지럽도록 돌려대겠지.
그리고, 아! 킬로만자로. 적도 부근에 뿌리를 내리고도 만년설(萬年雪)에 덮여 있는 '번쩍이는 산', '빛나는 산'.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는 법. 그 차가운 존엄함으로 마음의 세수를 하노라면, 어느새 노을이 지고, 구름 위로 솟은 만년의 백발이 붉게 물들겠지. 그리고 땅거미가 한 무리의 코끼리들을 데리고 그 기슭으로 사라지면, 깜깜한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릴 별들, 별들….
기다림은 늘 지루하고 초조한, 존재의 공회전이라 했던가요? 간절하게, 하염없이 기다리다, 케냐 행 마지막 비행기가 막 떠났다는 바람의 전언을 듣고 오늘도 쓸쓸히 돌아섭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오로지 기다리는 자의 몫이니까요. 낡은 관념의 그림자로 어두워 오는, 저 하늘을 건너고 또 건너서 가면 그 어디쯤에 케냐가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제게 케냐는, 여기가 아닌 저기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입니다. 가보지 못해 더욱 아름다운 꿈의 궁전입니다. 내일 다시 출발할 겁니다. 때 묻은 일상에서 탈출하여 꿈의 신천지에 도착하기 위해.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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