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사람이 변하기는 어렵다

입력 2012-12-04 07:33:36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 중에서)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나아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 행동의 결과 평가 등을 결정한다. 프레임을 '나'라는 존재에만 한정한다면 결국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프레임이다.

프레임을 바꾼다는 말은 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의 어제와 오늘을 규정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래로 걸어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프레임을 고집하면서 지속적으로 합리화해 나가는 것이 훨씬 편한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프레임을 바꾸지 않는다.

프레임이 고정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러한 고정이 '터널 비전 현상'을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자동차를 타고 터널로 들어가면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고 터널 안의 풍경에 고착된다. 터널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이 자신의 비전으로 존재할 때, 그리고 그 존재가 스스로를 규정할 때, 그리고 스스로 똑똑하고 위대한 사람이라 판단할 때 그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프레임이 고정된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정당성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똑똑한 사람은 열린 프레임을 지닌 채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내가 만든 사각형의 틀이 프레임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프레임 안에 나를 가두어 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프레임도 세상의 풍경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내 스스로 잘라놓은 사각의 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레임은 선택의 개념이기도 하고 단절의 개념이기도 하다. 선택이 프레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면 단절은 선택한 다음의 바로 그 결과이다. 하지만 단절이라는 프레임에 나를 가두는 순간 프레임이 지닌 역동적인 의미를 잃어버린다. 프레임 안과 밖이 독립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네모난 틀 속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것만으로 독립된 풍경은 아니다. 틀 바깥에 존재하는 풍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레임은 프레임을 만든 프레임 바깥의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레임이 틀 바깥의 세계와 역동적으로 교류할 때 자연스럽게 패러다임과 만난다. 프레임과 패러다임을 규정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프레임과 패러다임의 차이를 'boom'과 'fashion'의 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boom'은 일시적 사회현상이지만 'fashion'은 지속적인 문화다. 프레임이 틀 바깥의 세계와 역동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면 'boom'에 그친다. 특히 그 프레임이 패러다임과 어긋난 방향으로 결정되면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든다. 개인적 욕구가 사회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책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boom'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fashion'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은 하나다. 자신의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끊임없이 다른 프레임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프레임을 변화시켜야 한다. 프레임은 다른 프레임과 소통할 때 진정한 프레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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