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의 세계화] ⑤미지의 나라 성산가야

입력 2012-12-01 08:00:00

이름만 전해지는 왕국…1,500년 전 실체는 어디에 있는지…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의 야트막한 언덕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가야의 옛 무덤인 성산리 고분군(사적 86호) 전경. 성산가야의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능선을 따라 130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성주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의 야트막한 언덕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가야의 옛 무덤인 성산리 고분군(사적 86호) 전경. 성산가야의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능선을 따라 130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성주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86년 계명대 박물관이 성산동 고분군 38,39,57,58,59호분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 위에서부터 귀고리, 목긴 항아리, 뚜껑있는 굽다리 접시, 양쪽 귀 달린 부심발, 벼 낟알이 붙어있는 뚜껑있는 굽다리 접시. 계명대 박물관 소장.
1986년 계명대 박물관이 성산동 고분군 38,39,57,58,59호분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 위에서부터 귀고리, 목긴 항아리, 뚜껑있는 굽다리 접시, 양쪽 귀 달린 부심발, 벼 낟알이 붙어있는 뚜껑있는 굽다리 접시. 계명대 박물관 소장.

성산가야는 대가야(고령),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고령가야(함창) 등과 함께 가야의 하나로 불리지만, 안타깝게도 성산가야에 대한 정설은 찾기 힘들다. 문헌과 사료의 빈곤 때문이다.

전기 가야연맹 맹주인 금관가야나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 대가야는 많은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통해 서서히 실체가 밝혀지고 있지만, 다른 가야 소국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다.

특히 성산가야는 최근 발간된 '성주 성산동 고분군 발굴조사 보고서'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고고학적 조사와 검증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주지역에서만 '성산가야의 역사적 전통'을 문화의 근간으로 삼아 활용할 뿐 성주를 벗어나면 성산가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야 역사에서 제대로 된 연구 결과와 유적에 대한 조사가 없다 보니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를 잃고 있는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성산동 고분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묘제(墓制)의 형식이 신라형식이라는 이유로 가야의 일원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해 성산가야의 정체성 규명이 가야 연구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지(未知)의 나라 성산가야, 대가야와 문화적 차이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에 나라 이름만 있을 뿐 발전 과정이나 내부 구조, 멸망 시기 등의 역사적 사실 기록이 전혀 없다. 현재까지 미지(未知)의 나라인 셈이다. 성산가야를 벽진가야(碧珍伽耶)로 부르기도 한다. 성산(星山)의 지명은 신라 경덕왕이 757년에 일리군(고령군 성산면)을 개칭한 이름이다. 이 때문에 성산가야 명칭을 경덕왕 이후 사용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지역의 지방호족이었던 이총언(李忿言) 세력이 신라 말 반 신라적 명분의 하나로 성산가야라는 국명을 조작해냈다는 학설도 있다. 이 지역에 벽진국(碧珍國)이란 독립소국이 있었으나 4세기 말 이후 신라 영향권에 편입된 후 6세기 초반에 신라에 병합됐다는 것. 성주가 낙동강 서편임에도 유물의 특징은 인근 고령과 달리 신라의 출토품과 거의 유사하다는 이유로 성산가야는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중심이 된 전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다가 신라의 영향권에 편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이뤄진 학계의 연구 성과를 볼 때 성산가야는 일정 시기 동안 가야 일원으로 소속된 상태였으나 타 가야국보다 이른 시기에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산가야는 대가야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대가야 권역의 문화적 영향이 남아 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문화적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성주지역에 분포하는 성산동 고분군, 용각'수죽리 고분군, 명천리 고분군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가야와 달리 신라에 가깝다. 이 같은 차이는 성산가야의 문화가 정치'문화적으로 강력하면서도 광범위한 세력권을 가지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고령 대가야의 영향보다 오히려 낙동강 건너 멀리 떨어진 대구와 경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성산가야가 이른 시기에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음을 보여 주는 단초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양상은 신라와 흡사하지만 토기의 제조 기법과 양식 등 세부적인 면은 신라의 양식과 달리 성주지역의 독특한 지역적 독자성을 띠고 있다. 일정 기간 성주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이 유지됐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성주지역의 고분군

성주지역에는 74개소에 고분군이 분포돼 있다. 그 가운데 성산리 고분군이 중심 고분군이다. 성산리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일제장점기에 구 1'2'6호분, 대분'팔도분 등 5기와 1986년 계명대 박물관에서 5기(38'39'57'58'59호분)를 발굴, 조사해 묘제를 파악했다. 또 1998년 대구한의대 박물관에서 성산리 고분군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연결되는 명포리 고분군의 소형 봉토분 5기와 석곽묘 20여 기를 발굴조사했다. 2003년에는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성산리 고분군 서쪽 들판을 건너 1km 정도 떨어진 시비실 고분군을 발굴조사해 성주지역의 봉토분의 묘제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대형 봉토분과 능선 사면에는 소형 수혈식 석곽묘들이 밀집 분포해 있다.

성산리 고분군의 묘제 가운데 특이한 것은 매장 주체부 한쪽 벽에 잇대어 감실을 설치한 감실부곽고분이다. 이것은 막돌로 네 벽을 쌓지만 한쪽 벽을 넓게 확장해 바닥보다 약간 높게 벽장처럼 만들어 부곽으로 사용한 묘제이다. 주곽과 부곽의 평면 형태가 '철자'(凸字) 형태인 이 묘제는 현재까지는 주로 명포리 고분군과 시비실 고분군에 분포한다. 매장 주체부를 대형 판석을 주로 사용하고, 할석으로 보강한 판석은 대구 달서 고분군과 매우 닮아 있고, 그밖의 할석식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

성주 월항면과 칠곡 약목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화산 정상부에는 가야시대 산성인 봉화산성이 있다. 산 정상에 토축과 석축이 섞여있는 산정식 산성이다. 전체 둘레가 1km 정도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고 남쪽 일부에는 조선시대 봉수대 석축도 남아있다.

용각리 고분군은 백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월항면지역으로, 성주의 동쪽 경계인 봉화산 능선에 분포된 대형 고분군이다. 규모와 숫자로 볼 때 성산리 고분군 다음으로 큰 고분군이다. 봉하산에서 월항면 용각리로 뻗어 내린 높은 능선 줄기 정상부를 따라 직경 20~30m의 대형분 10여 기가 열을 지어 분포해 있다. 지표 높이 250m 능선 정상부에 위치한 대형분 1기가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지만, 할석으로 장방형의 석실을 쌓은 횡구식 구조이며 그 아래 능선에는 직경 5~10m의 소형 봉토분 50여 기가 산재해 있다.

명천리 고분군은 금수면 명천리 에그네재를 중심으로 주변 능선 정상부에 분포된 대형 봉토 고분군이다. 할미산성 또는 노고산성으로도 불리는 명천리 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싼 산정식 산성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 정상부는 돌로 쌓고, 길게 이어지는 북쪽 능선에는 흙으로 쌓은 방어용 산성으로 둘레가 1km 정도 된다. 산성은 높고 앞이 훤히 트여 가야산과 대가천 하류의 고령 방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 내부에서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채집돼 성산가야 세력이 대가야를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던 능선은 다시 동서로 방향을 바꾸며 돌아가는데 동서능선 정상부를 따라 봉토 직경 20~30m의 대형분 7기가 10~20m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서 있다. 산성 쪽으로 연결된 남북능선에도 10~20m의 중형분과 소형 석곽분이 밀집 분포돼 있다. 이처럼 성주지역에는 성주읍의 성산성과 성산리 고분군, 월항면의 봉화산성과 용각리 고분군, 금수면의 노고산성과 명천리 고분군 등 3곳의 대형 고분군이 존재하면서 성산가야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군청 박재관 학예사는 "성주지역 고분군 규모는 전국의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양과 질이 뒤지지 않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일찍부터 사적으로 지정돼 보존'관리해 오고 있는 성산리 고분군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조사와 보존'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훼손과 도굴 등의 피해를 입어 안타깝다"고 했다.

◆향후 과제

성산가야에 대한 연구는 인근 고령 대가야를 비롯한 기타 가야권역에 속하는 지역에 대한 연구에 비해 거의 손을 놓은 상태이다. 심지어 단편적인 자료들과 고고학적 성과를 활용한 연구에서 이른 시기에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나 가야의 일원으로서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1천5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실존했던 미지의 나라, 성산가야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 나가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 성산가야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고 있는 학계에 활발한 연구활동 지원을 통해 실체 규명에 나서야 한다. 특히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 더 이상 훼손이나 도굴되지 않도록 성주지역 고분군에 대한 조사와 보존관리 방안 수립이 절실하다. 일제강점기(5기)와 1986년 계명대의 학술발굴(5기) 외 일부 주변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만 이뤄진 성산리 고분군의 대형 봉토분에 대해서도 학술조사가 시급하다. 글'사진 성주고령'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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