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每日글짓기 공모전 작품집 발간

입력 2012-11-29 11:13:09

당선작 81편 수록

박혜경 씨
박혜경 씨

매일신문사 중부본부는 '제566돌 한글날'을 맞아 지난 9월 21일부터 10월 21일까지 개최한 '제25회 매일 한글글짓기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을 묶은 책 '가을, 문학을 입다'를 출간했다. 이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박혜경(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씨의 '가장 소중한 보물, 가족', 각 부문 장원 작품 8편 등을 포함해 당선작 81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대상과 부문별 장원 작품은 다음과 같다.

▷대상=가장 소중한 보물, 가족(박혜경'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일반부 운문 장원=국화(박인자'칠곡군 기산면 봉산1리) ▷고등학생부 운문 장원=하루가 준 선물(이새영'우석여고 2학년) ▷중학생부 운문 장원=국화(곽남경'영주여중 3학년) ▷초등학생부 운문 장원=엄마를 기다리며(정유진'정수초 2학년) ▷일반부 산문 장원=교자상을 닦으며'''(문삼숙'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고등학생부 산문 장원=어머니(배한솔'경주여고 2학년) ▷중학생부 산문 장원=미스터 헨드릭스(최준원'형곡중 3학년) ▷초등학생부 산문 장원=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수철'진량초 5학년)

◆ 대상, 장원 등 9개 작품

◇대상/ 가장 소중한 보물, 가족

(박혜경 /경북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정수리에 내리꽂히던 8월의 뜨거운 태양도 추석이 지나자 한층 누그러졌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먹으며 씨 없는 청도 반시는 붉게 익어간다. 크레파스로 그려도 저리 붉고 맑은 감빛을 내지 못하리라.

청도지역은 특산물로 씨 없는 감, 청도반시가 유명하다. 씨가 없는 이유는 청도 감나무의 경우 암꽃만 맺는 품종이기 때문이다. 암꽃과 수꽃이 만나야 씨가 생기는 데 청도에는 수꽃 감나무는 베어내고 주로 암꽃 감나무만 남아 있어 수정이 되지 않는다. 또한 청도는 산이 높고 오목한 바구니처럼 지형이 분지형태라 감꽃이 피는 5월에는 안개가 짙어 꽃가루를 옮길 벌들이 날아다니기도 어렵다. 하지만 청도반시는 씨가 없기 때문에 더욱 차지고 당도가 높다. 다른 지역 감들은 씨앗을 발라내고 나면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반 토막이지만 청도반시는 오롯이 한 놈을 통째로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알뜰한가 말이다.

고향집에도 감나무가 있었는데 봄날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가득 연노란 감꽃이 꽃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쪼그리고 앉아 동생이랑 열심히 주워 먹었는데, 처음엔 떫고 별맛이 없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씹으면 단맛이 나온다. 왕관처럼 생긴 감꽃을 명주실로 꿰어 목걸이도 만들고 머리에 얹어 머리띠로 사치도 부려보고 언니 손가락에 꽃반지도 끼워주다 보면 봄날 아침이 쌩~ 달아나곤 하였다. 무더운 여름날, 감나무는 더없이 좋은 그늘이 되어 주었고 가을에는 주렁주렁 달린 홍시를 따 먹다가 얼굴에 온통 감마사지를 하곤 하였다. 감물은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아서 가을 블라우스에는 항상 훈장처럼 얼룩져 있었다.

붉은 빛 청도반시에 홀려 동창천이 굽이쳐 흐르는 청도 운문산 계곡으로 가을여행을 떠난다. 청도 임당리마을 김씨고택. 내시가 살던 전통고택이다. 내시는 많고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 씨 없는 감마을, 청도에 둥지를 틀었을까? 김씨고택은 19세기 조선의 궁중내시였던 김일준이 통정대부 정3품의 관직을 지내다 고향으로 내려와 지었다고 전해진다. 16대까지 성이 다른 내시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어 왔으며 17대 이후로는 실제 내시로 봉직하지 않고 지역 마을에 봉사하며 자식도 낳아 키웠다고 한다. 내시는 양자를 삼을 때 후천적으로 고자인 아이를 택했는데, 이런 이유로 가난한 집에서 일부러 어린 자식을 거세시킨 뒤 내시 집안에 입양시키기도 하였다. 내시들도 남성을 잃었지만 혼례를 치러 아내를 맞이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시 집안의 법도에 따라 시집온 아녀자들은 한 번 들어오면 평생 대문 밖을 못 나가고 쓸쓸히 늙어 갔다.

어린 나이에 팔려 와서는 엄격한 궁중의 법도와 내시의 교육을 받는 아이들. 젖 한 번 물려보지 않은 남의 자식을 키우며 궁궐에 계신 남편만 기다리는 아녀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과 살 한 번 부대껴 보지 못한 아내를 두고 구중궁궐 속에서 다른 님을 모셔야 하는 내시. 서로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그들을 조각보처럼 하나로 묶어주는 끈끈한 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 보물을 임당리 김씨고택 마당에서 찾아본다.

김씨고택은 솟을대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5칸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큰 사랑채, 우측에 작은 사랑채가 있다. 대문과 다른 건물들은 서남서향이거나 임금님이 계신 북향인데, 큰 사랑채와 그 뒤에 있는 곳간 채는 남향을 하고 있다. 집안에 오가는 사람들을 쉽게 살피기 위한 구조이다. 특히 손님이 방문하면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과정을 큰 사랑채에서 한눈에 볼 수 있게끔 배치하여 여느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한 내외 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채에서 집 안팎의 출입, 특히 안채의 출입을 감시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마루를 두르고 있는 목판마다 보통 사람의 양쪽 눈 간격 정도의 거리를 가진 작은 구멍을 여러 개 새겨 놓았고 작은 사랑채 옆에는 몸을 숨길 만큼 작은 토담도 세워져 있다. 토담에 숨어서 몰래 소리를 엿듣거나 구멍을 통해 누가 드나드는지 일일이 감시할 수 있었다. 외부인은 반드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가운데 있는 작은 문을 지나야 안채로 들어 갈 수 있다. 마치 아파트 입구에서 경비아저씨가 구멍으로 몰래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것 같아 몹시 불쾌하다. 그냥 훤히 보이도록 나와 있으면 될 것을 왜 숨어서 몰래 엿보는 걸까? 구멍만 봐도 숨이 탁 막힌다. 그 구멍 속에 서슬 퍼런 감시의 눈빛이 총알처럼 내 가슴에 꽂힌다. 안채에 갇혀 살았던 아녀자들은 남편도 없이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을까? 대궐처럼 넓은 안마당도 감방같이 느껴진다.

가정이 있어도 궁궐 속에서 임금을 모시고 살아야하는 내시는 태어날 때부터 고자이거나 후천적으로 거세한 남성이었다. 당연히 아녀자의 일상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안채로 드나드는 입구에 감시구멍을 만들어서 출입을 감시하고 통제하여야만 안심이 되었을 게다.

후손들이 모두 외지로 떠난 낡은 고택 사랑마당 연지 속에 개구리 한 쌍이 한가롭게 뛰어 논다. 저렇게도 자유가 그리웠을 내시의 삶.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수발을 들고 바람이 불까 먼지가 묻을까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임금의 그림자가 되어 허리가 휘어지도록 엎드려 따라다니는 내시에게 자유는 얼마나 달콤했을까. 아니 어쩌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 채 한평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구중궁궐 속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항상 땅에 엎드려 있는 삶이 자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시는 그렇게 일생을 살아왔으니, 자신의 집에 와서도 문에 구멍을 파고 토담에 그림자처럼 붙어서 아녀자를 감시하고 살피는 외로운 삶을 살아 왔다. 그것이 본인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고 보호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아녀자에게는 감시였고 구속이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번뜩이는 시선은 아녀자들의 몸을 묶는 사슬이었다. 시선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권력이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시 자신의 자유는 또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하고서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시의 안타깝고 처절한 삶이 나무 틈을 파고들어 구멍을 만들었다는 생각도 든다. 구중궁궐에서는 임금을 살펴야 하고 집에 와서는 가족들을 살펴야 하는 외로운 삶. 서로에게 벽은 있었지만 애틋한 마음 또한 구멍을 넘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사랑은 결국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상대를 보고 살피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일 수 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는 내시의 마음이 안쓰럽고 처량하다.

청도반시가 다른 감보다 더 차지고 달콤한 것은 비록 암수꽃이 만나 씨를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여름 내내 뜨거운 햇볕을 견디고 모진 비바람을 잘 이겨냈기 때문이다. 내시가족 또한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남남이 모여 400년 동안 대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아끼고 보듬었기 때문이리라.

씨앗이 없어서 더욱 맛있는 청도반시처럼 고자와 처녀, 그리고 소년이 만나서 가장 소중한 보물,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시 혼자서는 아버지도 아들도 될 수 없다. 함께 모여야만 의미가 부여되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라는 가족이 이루어진다. 비로소 혈육보다 더욱 애틋하고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는 것이다.

맑고 투명한 붉은 빛 청도반시가 임당리 김씨고택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 일반부 운문 장원

박인자 칠곡군 기산면 봉산1리

국화

맑은 하늘에 펼쳐 둔 그리움 조금씩 뜨거워지는 내 마음 같다 새들이 날다 찍어 둔 발자국 눈꽃처럼 뜯어내어 문풍지에 곱게 붙이면 있는 대로 하얗게 웃는 네 모습 불을 끄고 밤처럼 함께 누워 본다.

◇ 고등학생부 운문 장원

이새영 우석여고 2학년

하루가 준 선물

아침에 너른 벌을 걸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금빛너울이 함빡 벼를 적시고

방울방울 터지는 상쾌한 향기가 담긴 바람으로

세상 저편까지 어둠을 밀어내는

아침의 축복을

오후에 높은 하늘을 올려다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밀려오는 거대한 아득함

넓게 편 양손으로도 마음으로도

다 품지 못할

그저 빠질 것만 같은 무한한 깊이를

이른 저녁에 지는 노을 속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마지막 빛을 내리비추며

붉은 얼굴을 붉게 타오르는 붉은 노을의 폭발

폭발의 불꽃으로 몸을 적셔도 끝없이 밀려오는

검은 밤의 진군을

깊은 밤에 불을 켜는 별들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어둠에 잠겨 있는 별들의 빛이

자기별을 돌고 돌다 다른 별빛과 마주쳐

이리저리 어울리는 별빛의 왈츠를

이 모든 것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침이 오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별이 지는

아름다운 하늘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을

◇ 중학생부 운문 장원

곽남경 영주여중 3학년

국화

가을이 손짓하는 들판에는

찬 서리를 등진 국화꽃이

아무도 모르게 피어났습니다.

지금껏 뿌리를 단단히 덮은,

늘 국화에게 말을 걸어주던,

그 옛날에도 보드랍게 감싸 안아 준,

땅은 아직까지도 사랑으로 남아

묵묵히 줄기를 지탱해줍니다.

국화는 마지막까지

그 땅을 추억할 테지요.

서산이 붉게 물드는 저녁,

가을의 변두리에 국화가 섰습니다.

내년에도 저 내년에도

국화는 필 테지요.

이제야 국화에게 다가선 가을이

그림자를 걷어냅니다.

땅은 말없이 지켜보다가

가을이 사라진 뒤에야

국화의 껍데기마저 끌어안습니다.

◇ 초등학생부 운문 장원

정유진 정수초 2학년

엄마를 기다리며

사각

한 입만 먹어야지

사각 사각

두 입만 먹을까

사각 사각 사각

세 입이나 먹었네

엄마를 기다리며

한 입, 두 입, 세 입

입 안 가득

퍼지는 사과 향기

가슴 가득

차 오른 보고픈 엄마

◇ 일반부 산문 장원(문삼숙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교자상을 닦으며…

베란다 한쪽 귀퉁이에 켜켜이 먼지 쌓인 게 기대 서 있다. 오래된 벽지가 삭아서 구멍이 송송 나 있어 새로이 장판 도배를 하기 위해 짐을 들어내다 보니 베란다 구석까지 들추게 되었다. 정갈케 보관한다고 신문지로 싸서 보에 넣어 지퍼를 잠가 두었지만 베란다에서 물을 자주 사용하다 보니 곰팡이로 썩지는 않았을까! 했더니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교자상이었다.

결혼 할 적에 제사상으로 쓰라며 교자상과 병풍을 마련해 주신 엄마는 신혼살림 중 이부자리보다 더 신경 써서 챙겨 주신 거였다. 그러나 어른들의 제를 절에서 모시게 되었고 이 교자상과 병풍이 필요치 않게 되어 그동안 손이 안 간 것인데, 아마도 20여 년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 공부할 때 책상으로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엄마랑 마주 앉아 책 읽어주고 가르침을 받을 나이가 훨씬 지나 버려 무용지물이라 버릴까 하다가 아까워 한 참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 당시 달성군에 위치한 옷 칠 공장을 직접 찾아가 야무지게 칠이 잘 된 것을 고르고 골랐던 것이고, 또 성치 않으면 모를까 멀쩡한 것을 버리자니 왠지 엄마의 마음을 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옻 냄새를 맡으면서 고르다 보니 어릴 적 옻나무를 가죽나무인 줄 알고 잘 못 건드려 옻이 올라 온몸에 두드러기로 고생한 적이 있어 내 코를 막고 아무거나 고르라며 엄마를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예쁜 호마이카 상도 많은데 왜 옻칠한 교자상을 사야 하냐고 했더니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심정 알지…"라고만 하셨다.

20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힘주어 하신 말씀이 어제였던 것만 같은데…. 엄마는 화났을 때 '속이 까맣게 탄다.'라는 말을 곧잘 하시곤 했다. 어찌해야 까맣게 타는 것이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알 수 없었던 그 말씀은 문득 교자상을 보는 순간 엄마 속이 이랬나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까맣게 탔지만 숯검댕이처럼 푸석하지는 않았을 테고, 여섯을 키우면서 울면서도 웃는 날이 있었기에 교자상처럼 조금은 빛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364일을 애 먹이고 단 하루 기쁨을 준다 해도 기뻤던 그날을 생각하며 자식에 대한 애정을 쏟는 것이 부모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이 헤아려 본다. 옻칠하여 며칠 동안 말리고 또 칠하고 그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20여 년이 지나도 이렇게 말짱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엄마 같다. 무지막지하게 꾸지람을 하고, 자식을 버릴 것 같은 최후통첩을 하게끔 속을 썩여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키워서 가정을 가지도록 해 주신 엄마. 무려 여섯 명이서 속을 까맣게 태웠어야 했으니 아마도 엄마 속은 이 교자상보다 더 단단하고 새까맣겠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느린 행동과 게으름, 말대꾸로 연일 폭포 같은 심장소리와 굵은 폭포수 줄기에서 튕겨져 나오는 물방울로 푹 젖은 옷을 말리듯 가을 햇살에 나앉았는데, 옷은 마르지 않고 되레 눈물만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우울함이 찾아 들었다. 그로 인해 해보자던 운동도 재미없고 해서 바지런히 몸이라도 움직여 수용(受容)하지 못 할 거면 잊어버리자며 짐 정리 할 겸 도배와 장판을 새로이 바꾸려고 손을 댄 것인데, 거기서 20년 전의 가난과 슬픔과 추억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듯 교자상이 따라서 나온 것이다.

내 속은 이제 갈색 쯤 되려나. 엄마처럼 까맣게 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옻칠 한 번 하고 5일 말리고 또 칠해서 말리기를 반복하여 만든다는 교자상, 그런 장인 정신으로 만든 것이기에 버텨온 것일 게다. 아니, 버틴 거라면 온 힘을 다해 '억지로'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 것이라면 버틴 게 아니라 지당한 일이다. 엄마는 빛깔 곱고 칠이 잘된 교자상 고르듯 자식은 고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쳐 주신 것이었을까?

그렇게 세세히 살펴서 고른 것이 20년 동안 변치 않은 교자상처럼 선택할 수 있는 게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라면 내 아들 또한 이 엄마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피장파장이다. 엄마 심정을 어렴풋이 알기까지 20년 걸렸고, 다 알려면 또 얼마나 더 걸릴지…. 교자상을 닦으며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일찍이 내 제사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는데 그 맛이 쓰다. 죽어 제삿밥이나 얻어먹게 될는지….

머잖아 어떤 그녀의 남편이 되어 알콩달콩 살다가 저를 쏙 빼닮은 아들 낳아 저랑 똑같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이 엄마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줄까? 괜히 뚱딴지같이 대리 복수를 하는 것 같아 스스로 놀란다. 엄마도 그랬다. "너 같은 딸을 꼭 낳아라"라고. 다행히 나 같은 딸은 낳진 않았지만, 점점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간다는 사실이 무섭다. 속이 점점 새까맣게 타 들어 갈까봐….

◇ 고등학생부 산문 장원

배한솔 경주여고 2학년

어머니

큰 도시의 현란한 밤거리처럼 학교 앞은 자동차의 화려한 불빛과 그 속에선 목이 긴 기린이 되어 버린 어머니들의 기다림으로 북적입니다. 하나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올라타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과 동경에 금방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갑니다. 무서운 세상이라고 떠들어대는 요즘이지만 나는 늘 혼자 어두운 길을 겁 없이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여관 청소 일에, 늦은 오후에는 공장 야간근무 아저씨들의 밥을 해주시며 누구보다도 하루를 부지런하고 빈틈없이 아니 여유라고는 없이 일을 하시며 보내십니다.

"아이고, 우리 딸 왔나. 피곤하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시며 자동로봇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찬 기운에 잠을 깨려 애쓰시는 모습과 무엇인가를 먹이고 싶어 하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지켜보면서 괜스레 이유 없이 화가 납니다. 찬바람이 불면 어머니의 손은 더더욱 메말라지고 잎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변해버립니다.

"엄마, 손에 핸드크림 좀 발라, 손이 그게 뭐야!" 멋없이 던져진 핸드크림을 발라보시지만 매일같이 일 하시는 어머니의 손에는 그 어떤 고가의 크림이라도 윤기 나게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어머니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불평과 어리광 따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고3이 된다는 압박감과 불안 때문에 저의 앙칼진 말과 행동은 더 해만 갔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밤을 새며 공부해 봐도 과외 하는 친구들과의 격차를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노력하면 될 거야' 하며 내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해 보지만 현실은 정말 냉정했고, 나에겐 그런 운조차도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 또한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소박한 꿈이 있습니다. 수능대박으로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지길 간절히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가는 제주도 여행입니다. 수학여행으로 학생들도 가는 제주도를 우리 어머니는 가보시질 못했습니다. 지난봄 수학여행 길을 "아이고, 좋겠네."하시며 마치 어머니께서 가시는 듯 즐거워하시며 푸석한 얼굴가득 미소 짓던 그때 모습을 보면서 죄송스러웠고 슬펐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더 나의 마음을 단단히 다져보는 기회가 된 것 같고, 어머니의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은 부푼 꿈이 분명히 있기에 겁 없이 달려가 보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타서 당당하게 어머니와 제주도 여행을 갈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알게 된다면 혼날 일이겠지만 저에겐 대학 입학보다도 더 뿌듯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식당에서 남은 밥을 가져오셔서 "아이고, 아까워라."를 몇 번씩 되풀이하시다 결국 누룽지로 만들어 봉지를 묶어 나누어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남에게 주는 것을 희생하시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어머니에게 받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가끔은 불쑥불쑥 퉁명스러운 말과 행동이 내뱉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겁니다. 저의 마음을….

어머니! 흔하지만 망설였던 그 말을 글로 표현합니다. 사랑합니다.

◇ 중학생부 산문 장원

최준원 형곡중 3학년

미스터 헨드릭스

우리 집에는 몇 가지 희귀한 보물들이 있다. 음이 자주 내려앉는 삼익 호루겔 피아노와 가끔씩 어항 밖으로 점프를 시도하는 늙은 물고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상점에서 산 하모니카까지. 그중에서도 요즘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2년 전에 산 기타다. 그리 비싸고 좋은 기타는 아니지만, 기타를 칠 때 나는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처음 샀을 때는 코드 몇 개만 겨우 잡을 줄 아는 초보였지만, 유명한 기타 곡이나 오디션 프로그램 화제 곡을 연습하면서 점점 실력이 늘었다. 실력이 늘자 자신감이 붙어 학교에서 기회가 생기면 기타를 치고는 했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박수를 쳐 주는 게 좋았다.

그런 나에게 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졌다. 노래를 슈퍼스타 뺨치게 잘 부르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학교 축제 장기자랑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장기자랑 오디션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 내내 기타를 잡고 오디션 곡을 연습했다.

드디어 월요일이 되어 나는 기타를 가지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등교했다. 그런데, 그날 점심시간, 그 친구와 함께 통기타부 선생님께 불려간 나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통기타부인 그 친구가 통기타부 공연에 나가야 해서 나와 같이 장기자랑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나에게 그 친구는 통기타부와 함께 장기자랑에 나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되면 나갈 곡도 바뀌고, 기타 한 명과 노래 한 명이 더 추가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그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말 내내 힘들게 연습한 곡을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곡을 연습한 나는 토요일 통기타부 첫 연습에 가게 되었다. 명색이 통기타부인데다가 함께하기로 한 친구가 학교에서 기타를 가장 잘 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습은 형편없었다. 새로 들어온 보컬의 목소리는 갈라지는 데다, 두 보컬의 화음이 맞지 않아 마치 두 명이서 노래를 누가 더 시끄럽게 부를 수 있는지 대결하는 것 같았다.

기타는 더 끔찍했다. 방금 말해준 걸 바로 까먹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진 그 아이는 연습 전에는 에릭 클랩튼이니 지미 헨드릭스니 하며 이상한 곡을 마구 치면서도 연습만 시작하면 기타를 처음 치는 어린아이가 된다. 처음에는 연습이 덜 되어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혼자 연주를 잘하면서 같이 연습할 때만 되면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빠르거나 늦었다. 나는 실력도 없으면서 만날 지미 헨드릭스 타령이나 하고 있는 그 아이에게 '미스터 헨드릭스'라는 별명을 속으로 붙였다. '미스터 헨드릭스'는 학교에서 기타를 가장 잘 치는 게 아니라, 그저 혼자 잘났을 뿐이었다. 그 아이에게 기타는 혼자 연주하는 게 아니라 보컬들의 반주를 해 주어야 한다고 충고도 해 주고 싶었지만, 자기가 틀릴 때마다 쑥스럽게 웃는 그 아이의 얼굴에 대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컬들의 화음은 나아졌지만, '미스터 헨드릭스'의 기타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축제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원래 잘 되어가던 공연 준비에 그 아이가 끼어들어 공연을 망칠지도 몰랐다.

내가 청소 당번이라 연습에 늦은 어느 날이었다. 연습실로 들어가려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철문을 열려는 순간, 연습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말리지 마. 내 이런 사랑을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은 이 맘을……."

순간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미스터 헨드릭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곡이 끝나고, 두 번째 곡이 시작할 때쯤이었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형편없는 연주를 하다가 갑자기 실력이 는 이유가 뭐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곡이 끝났고, 녹슨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어? 준원이 왔네?"

"어? 어."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다시 합류하자 그 아이는 또다시 서툴러졌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짜증을 냈겠지만, 아까의 완벽한 연주를 듣고 난 후의 나는 약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연습이 거듭되는 동안, 대체 문제가 뭘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아이가 아닌 내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짜증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에 들리지 않던 내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내 기타는 내가 흥분하면 빨라졌다가, 차분해지면 다시 느려졌고, 보컬들은 소리가 큰 내 기타 소리에 맞추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마치 '미스터 헨드릭스'가 박자를 못 맞추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순간 나는 뭔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 아이는 일부러 다른 소리를 살려주려고 자신의 소리를 줄여가며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얕은 기타 실력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나는 손가락이 아프다는 핑계로 다른 세 아이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빠지니까 오히려 보컬들의 화음이 훨씬 잘 맞았고, 그 아이의 기타 소리도 더 이상 작게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다른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내가 돋보이는 독주 부분을 연습하는 데만 치중하느라 반주 부분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반주 부분을 잘 들어보니 내가 틀리는 부분도 많았다. 내가 반성할 때마다 우리 팀의 소리는 나아졌고, 선생님의 칭찬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제 사흘 뒤면 축제다. 이전의 나였다면 무대에서 화음이 안 맞으면 어쩌지, 박자가 틀리면 어쩌지 하며 불안에 떨었겠지만, 이번엔 걱정되지 않는다. 예전보다 훨씬 잘 듣는 연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혼자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내 의식을 바꿔 준 미스터 헨드릭스에게 감사하며,

Thank you, Mr. Hendrix!

◇ 초등학생부 산문 장원

이수철 진량초 5학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

나는 어릴 적 새총으로 참새를 잡아 구워 먹으니 너무나 고소하게 맛있었다는 동화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참새를 먹는 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놀라서 호기심이 생겼다.

'저렇게 빨리 날아다니는 새를 어떻게 돌로 맞힌다는 거지? 그리고 얼마나 고소하길래 그럴까?' 하고 궁금해 져서 참새 잡는 일에 엄청 관심을 갖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족들과 운동하러 아파트 뒷산에 갈 때마다 참새를 잡아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엄마가 주신 간식을 몰래 놔둬 보기도 하고, 돌멩이를 주워서 던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참새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나한테 잡히지 않았고 참새를 잡겠다고 별별 것을 다해 보는 나를 보고 어른들은 웃으면서 재미있어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나를 제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수철이, 새총 하나 만들어줄까?"

새총 하나만 있으면 새총 줄을 쫙 잡아당겼다가 팅 놓는 경쾌한 소리에 참새가 저절로 잡힐 것 같아서 나는 너무너무 좋았다. 할아버지는 3일이나 걸려서 직접 산에 나무를 구하시고 칼로 정성 들여 깎아서 Y자로 다듬으셨다. 그런 뒤에 할아버지는 낡은 허리띠에서 가죽을 잘라내 작은 사각형 조각을 만들고 구멍을 못으로 뚫은 다음, 고무줄을 뱅뱅 꼬아 걸어 주셨다. 그렇게 해서 만든 새총은 내가 정말 상상도 못할 멋진 새총이었다.

혹시 내 손에 가시라도 박힐까봐 얼마나 다듬으셨던지 나무가 반질반질할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그 멋진 새총을 들고 내가 총을 쏘아 볼 수 있게 늘 산에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 다닐 때를 골라서 내가 돌멩이를 쏘아 볼 수 있도록 늘 작은 돌멩이를 주머니 가득 주워 따라오셨다. "허허, 우리 수철이 오늘은 할아버지 참새 한 마리 구워 줄라나?"하시며 말이다.

나를 이렇게 즐겁게 하고 산에 가는 게 재미있게 했던 이 새총은 할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마지막으로 내게 주신 선물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얼마 뒤 할아버지는 편찮아지셔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 또 입원하면서 그렇게 고생하시다가 결국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고무줄도 다 늘어나서 너덜너덜 해졌고 나도 많이 자라서 더 이상 참새 잡이에 관심도 없어졌지만, 이 새총이 아직 내 방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이유는 바로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어떤 비싼 장난감이나 멋진 옷보다도 새총에 담긴 할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소중하다. 남들은 새총으로 참새를 잡아보겠다는 내 결심을 어린아이의 황당한 소원으로 웃고만 말았지만 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이해하여 정성들여 직접 만들어 선물로 주셨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항상 나를 이해하고 내 이야기를 싫증내지도 않고 천천히 다 들어주셨다.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은 용기를 갖고 직접 해 볼 수 있도록 해주시고 싶어 하셨던 할아버지의 배려와 사랑.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지면 새총을 손에 쥐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손때가 묻어 더욱 반들반들한 그 나뭇가지에서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지금도 그러고 있어 보니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할아버지는 내가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아오면, 편찮으셔서 링거를 몇 개나 꽂고도 병원에서 상장을 옆에 두고 의사선생님이랑 간호사 누나들한테도 자랑을 하시며 좋아하셨다. "우리 수철이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이렇게 글을 잘 쓰나? 나중에 훌륭한 작가가 되면 할아버지한테 사인도 해주라, 알겠제?" 하시면서 내가 쓴 글들을 모아서 읽어보시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세상 둘도 없는 나의 보물, 새총에 고대로 다 담겼다.

새총을 만져보면서 나를 위해주시고 나의 꿈을 키워주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느껴본다. 그리고 내가 자신 있고 잘 하는 글쓰기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도 해 본다. 그래서 이런 글쓰기 대회도 열심히 나가 지금 쓰고 있는 매사냥에 대한 내 소설도 더 열심히 쓰겠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멀리서도 내게 새총을 주시며 웃을 때처럼 지금의 나를 보고 웃으셨으면 정말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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