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만 블랙리스트?…일반인이 만들고 공개하는 시대

입력 2012-11-03 08:00:00

'블랙리스트'(blacklist). 감시가 필요해 비밀리에 공유되는 인물 명단을 뜻한다. 냉전시대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감시한 것이 단어의 연원이다.

그런데 좀 더 강력한 블랙리스트가 우리 역사 속에 있었다. '살생부'다. 조선시대 때 계유정난을 앞두고 한명회가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올린 것이다. 말 그대로 죽이거나 살릴 사람을 구분해 적은 명부다. 당시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될 인물과 도움이 될 인물을 가려 작성했다. 이를 토대로 좌의정 김종서 등을 제거한 다음 정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곧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외에도 세계 각국 정보기관에서 반체제 인사 목록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블랙리스트 없이는 권력을 얻을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던 셈이다.

◆고용시장 옥죄는 블랙리스트

요즘은 권력기관이 아닌 기업에서도 블랙리스트를 만든다. 최근 한 취업 포털사이트가 기업 인사담당자 1천159명에게 물었더니 83%가 '퇴사시키고 싶은 직원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답했다. '매사에 불만이 많은 직원' '근무태도가 불량한 직원' '업무 능력 및 성과가 떨어지는 직원' 등이 순위에 올랐다. 응답자들 중 67%는 해당 직원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다고 밝혔다.

기업이 해고의 칼을 치밀하게 준비해두는 이유는 대부분 기업의 운영 경비에서 인건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직원을 해고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비용 절감 방법이라는 것.

일부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도 블랙리스트를 공유한다. 일찌감치 '싹수가 노란' 구직자를 가려내는 것도 기업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채용 시즌이 되면 동종 기업 인사담당자들끼리 모임을 갖고 '면접 전형에 뽑았더니 상습적으로 불참한 구직자'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연락도 없이 퇴사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기업으로 간 신입사원' 등의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

그런데 이 경우 법적으로 '취업 방해'에 해당돼 문제가 될 수 있다. 근로기준법 40조(취업 방해의 금지)에 따르면 직원들의 신상정보를 공유한 것이 취업 방해로 판단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또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의 소지도 있다.

취업 방해 여부는 블랙리스트가 공유되는 범위가 좁을수록 명확해진다. 최근 불거진 치과 직원 블랙리스트 공개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지난달 말 국내 치과의사들이 접속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에 치위생사'간호조무사'치기공사 등 276명의 개인정보가 담긴 자료가 게재됐다. 실명, 나이, 경력 등 기본 정보는 물론 성향, 외모, 사생활 내용 등이 기록된 게 문제가 됐다. '불친절' '무단결근' '허위 이력서' 등 채용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있었던 것. 여기에 '뚱뚱함' '부모 이혼' '밤에 술집에서 일함' 등 외모 평가나 사생활 정보까지 기록돼 있어 인권침해 논란까지 불거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블랙리스트가 온라인에 익명으로 게재돼 출처가 불명확했고, 곧 삭제된 까닭에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당사자들은 피해를 당했더라도 증명할 수도, 어디에 호소를 할 수도 없는 상황. 각종 블랙리스트가 무분별하게 작성되고 공유되는 요즘 세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소비자와 기업, 서로를 블랙리스트에

소비자와 기업 관계도 블랙리스트로 얽혀 있다. 비용 문제가 중심에 있다. 허투루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며 서로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있는 것.

먼저 기업은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 개념을 마케팅에 도입해 일부 악성 소비자를 관리하고 있다. 블랙컨슈머란 기업을 상대로 구매한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과도한 피해보상이나 거짓 피해 신고 등의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가리킨다.

블랙컨슈머로 가장 골치를 앓는 곳은 늘 수많은 소비자가 드나드는 백화점, 대형마트 등 유통업계다. 특히 식료품 관련 블랙컨슈머가 악명 높단다. 지역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식료품은 변질 등의 문제가 제조나 유통 과정에서 발생했는지 구입 후 소비자에 의해 발생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며 "피해보상에 따른 비용 부담도 적잖지만, 블랙컨슈머가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문제를 공개할 경우 기업 이미지 손실에 따른 피해가 더욱 크다"고 말했다. 이에 유통업계는 반품 시 제품 누락이나 훼손을 세 차례 이상 저지른 고객에게 '주문거절' 통보를 하는 제도를 도입하거나 매장 내 폐쇄회로(CC)TV를 늘리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블랙리스트를 소비자 운동(?)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때 유행했던 '불매운동'은 특정 기업을 '찍어서' 가격 인하 등 소비자가 원하는 사항을 장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수시로 블랙리스트를 작성 및 공유하며 '불량' 업체를 가려내고 있다.

최근 인터넷 성형수술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비공개로 공유되고 있는 '성형외과 블랙리스트'가 한 예다. 단순 비용 비교는 물론 성형 부위별로 선호되는 성형외과와 피해야 할 성형외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 최근 성형수술 관련 의료사고가 심심찮게 뉴스에 보도되는 것도 블랙리스트 공유 붐에 한몫했다. 성형외과 블랙리스트를 검색해본 적 있다는 직장인 안모(31'여) 씨는 "성형수술은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 한 번 하면 되돌리기 어렵고, 일반인은 잘 모르는 전문 영역이기 때문에 정보를 충분히 얻어 신중하게 선택하기 위해서"라며 "소비자의 알 권리를 공유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소비자들은 전자상거래의 대표격인 인터넷 쇼핑몰 중 환불이나 반품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얌체 쇼핑몰' 목록을 공유하고 있고, 가짜 석유를 판매한 전력이 있는 주유소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공유하고 있다. '추천'보다는 '비추천'(안티)이 소비자 커뮤니티의 흐름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한 소비자 행동과 관련,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배현석 교수는 "과거에는 소비자들이 자기 권리를 제대로 요구하지 못했지만 최근 소비자의 인식과 지위가 높아지면서 일부 '튀는' 사람들이 블랙컨슈머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에 대해 기업이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외국에서는 이미 있었던 현상이다. 이러한 구도는 장기적으로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 경쟁력 강화 등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공익적 블랙리스트는 필요해

살펴보면 경제적 비용 문제를 떠나 공익 관련 블랙리스트도 적잖다.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최근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성범죄가 잇따르면서 사이트 접속자들 중 올해 기준으로 20대 여성이 31%(7만2천여 명)로 가장 많았다.

교육 분야에도 블랙리스트 제도가 있다. 각 대학은 입학 관련 허위 불량 추천서를 가려내기 위해 불량 추천교사 목록을 만들고 있다. 서울대는 올해 입학사정관 전형 안내를 통해 "추천인이 허위 사실 기술 및 과장된 평가를 할 경우 학생이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외에도 정부는 부실 저축은행을 걸러내기 위해 불법'비리 의혹이나 채무 불이행 등 부도덕 행위 소지가 있는 저축은행 대주주를 특별 관리하고, 증시를 조작하는 작전 세력은 '시장 건전성 저해 행위자'로 분류해 퇴출에 주력하는 등 수시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공익은 다시 국민 경제의 문제로 치환되는 셈이다.

황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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