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백일장] 가을맞이/가을비/도토리묵/가을로 가는 저녁

입력 2012-11-02 07:54:08

♥수필1-가을맞이

가을이다. 가까운 팔공산, 앞산, 수성못 심지어 도로의 가로수까지도 가을임을 드러내며 색깔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침에도 어제 입었던 똑 옷을 입고 출근길을 나선다. 아직도 여름옷으로 가득 차 있는 장롱 속을 보며 내 게으름을 탓한다. 가을이면 늘 할 일이 많다. 여름옷과 겨울옷을 갈무리해서 바꿔 넣어야 하고 이불들을 빨아 바꾸어야 하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 주말이다. 이번 주는 반드시 정리하고 갈무리하리라 다짐해보지만 또 무슨 바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이러다간 단풍이 다 지도록 가을을 못 볼 것 같아 모든 일을 또 뒤로 미루고 친구와 둘이서 팔공산을 찾았다.

우리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초입부터 차와 사람으로 붐빈다. 그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가을맞이를 한다. 여름 내내 녹음으로 푸르렀던 산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가진 것을 드러내고 있다. 참 아름답다. 조금 더 젊었을 때는 단풍이 곱다고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이젠 가을도 참 좋다.

높고 푸른 하늘과 코끝을 스치는 싸한 바람, 촌두부와 전, 칼국수로 요기를 하고 마음을 쏟아 놓으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오늘 가을맞이했으니 내일은 미뤄뒀던 일로 겨울준비를 해야겠다.

송지혜(대구 남구 대명동)

♥수필2-가을비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 해거름에 비 내리는 물안개가 너무 싱그럽다. 여름에도 이렇게 시원하게 내린 날은 며칠 없었던 것 같은데 가을비가 온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팔공산 여기저기에 산꼭대기로 서서히 올라가는 구름이 정말 이채롭다.

어느 연구자료에 의하면 봄비의 경제적 가치는 수천억원이라는데 가을비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대자연이 주는 정서적 풍요와 감동을 굳이 경제적 잣대로 들이대는 것이 속물인지 모르겠지만 이럴 때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주는 신비와 감동을 세계 사람들께 보여줄 수 있다면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사람의 인생살이에서도 중년이 사계절의 가을에 꼭 맞는 것 같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금의 7080세대. 바쁜 일상에 산을 찾고 가끔은 나를 뒤돌아보고. 이제는 자신을 위해 조금은 투자를 해보자. 가을 단풍을 밟으며 휴식을 주고, 나른한 나태함에 빠져보기도 하고 회복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자. 아직 가을걷이도 덜 마쳤고 인생 이모작도 나름 준비해야 한다. 가을 단풍이 절정인 지금 코감기가 아닌 마음의 감기가 깊어진다고 한다. 내일을 준비하며 꿈의 칼날을 날카롭게 다듬는 일도 휴식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허이주(대구 달서구 성지로)

♥시1-도토리묵

나무둥치를 망치로 두드리면

익은 도토리 우두둑 풀밭에 떨어져

바구니 가득 주워 머리에 이고

골목에서부터 엄마를 불렀다

도토리가루의 떫은맛을 우려낼 때

속상한 마음 밤새 가라앉혔다 같이 비워내며

맑은 하루를 시작했던 어머니

가마솥에 도토리묵을 쑤면서

자식들 둥글게 살아가길 바라며

긴 주걱으로 가마솥 바닥에

동그라미 그리던 모습만 남겨두고

바람 따라 산으로 가셨다

먹으려 하면 요리조리 빠져 나가도

숟가락 위에 얹히고 마는

밥상보고 도망치던 어릴 적 나를 닮은 도토리묵

추억도 부드럽게 같이 넘어간다

곽순분(김천시 남산동)

♥시2-가을로 가는 저녁

구름과 달이 시름하는 저녁입니다.

후텁지근한 열대야는

태풍이 안고 가고

선선한 바람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내 체온이 더 내려갈까 봐

잠을 재우는 저녁입니다.

귀뚜라미 울음 없는 저녁도

반소매는 추위를 탑니다.

모기도 수혈받기를 포기했는지

나에게 칭얼대기를 하지 않고

저만치서 눈치만 보는구려.

아! 벌써 가을로 가는 길인가

아직도 더 붉게 물들여야 할 사과의 마음에

내 진한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진실된 내 마음을 저 붉어지는 사과에 전하여

내님의 입을 통하여

가을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구나.

이 가을로 가는 저녁에.

여관구(경산시 사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원용순(경산시 압량면 현흥1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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