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한 50대 야구팬이 기자를 붙들고는 한동안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대구에 살면서 1년 중 가장 신나고 자부심을 느낄 때가 한국시리즈 할 때인데, 좁아터진 야구장 때문에 울화통이 터진다는 것이다.
"대구 사람들이 시즌 내내 얼마나 삼성 라이온즈를 열심히 응원을 했습니까?"라며 운을 뗀 그는 야구를 하지 않는 월요일엔 뭔가 허전하고, 이승엽이 홈런이라도 치는 날엔 온통 그 이야기를 하며 하루의 시름을 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뭐 딱히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대구서 그나마도 저 같은 서민들은 야구 보는 즐거움에 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구 야구팬들은 연고지를 대구에 둔 삼성 덕분에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삼성이 올해까지 3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 대구 사람들은 시즌 종료 후에도 한참이나 더 야구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 3년뿐인가. 삼성은 올해를 포함해 프로야구 출범 이후 지금까지 열린 30번의 한국시리즈에 무려 14번이나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등 포스트시즌 전체를 헤아리니 그 횟수가 25번에 이른다.
1985년에는 전'후기 1위 팀끼리 맞붙은 한국시리즈 제도하에서 삼성이 이를 모두 우승해 아예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으니 삼성 팬들은 프로야구가 태생한 이후 5차례를 빼고는 월급 외 보너스를 받듯 가을 야구를 즐겨온 셈이다.
그럼에도, 과연 대구 팬들은 가을잔치를 몇 번이나 제대로 즐겨봤을까?
"대구가 1등 하는 게 야구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도 야구장은 전국 최악 아닙니까."
1만 명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구시민야구장 때문에 축제의 주객인 대구 사람들은 매번 '티켓 구걸'에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작은 경기장 규모 탓에 홈경기는 딱 2차례만 치러진다.
한국야구위원회는 한국시리즈 경기방식을 구장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7전 4선승제로 승부를 가리는 한국시리즈는 두 팀 중 어느 한 팀, 또는 두 팀 모두의 홈구장 규모가 2만5천 석 이하일 때, 1'2차전은 1위팀 구장, 3'4차전은 상대팀 구장, 그리고 사실상 우승이 결정되는 5~7차전은 중립 구장인 서울 잠실구장에서 치르도록 하고 있다.
이런 규정으로 이번 한국시리즈도 1'2차전은 대구, 3'4차전은 인천, 그리고 5차전부터 우승팀이 가려질 때까지는 잠실구장에서 열리게 됐다. 한국야구위원회는 한국시리즈가 두 지역만의 축제를 넘어 전국의 프로야구팬들 잔치라 에둘러 말하지만, 결국 흥행 측면에서 넓고 좋은 구장에서 해야 더 많은 관중이 들어차 관중 수입도 더 짭짤하지 않겠느냐는 의도가 숨어 있다.
올 시즌 대구구장엔 54만4천 명이 찾아 매 경기 관중석의 82.1%를 채웠다. 이는 전국 8개 구장 중 가장 높은 좌석 점유율이다. 대구시민의 야구 열기를 최고의 축제서 2만 명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나마 대구시가 2014년까지 낡은 구장을 허물고 최대 수용 인원 3만 명, 좌석 수 2만5천 석 규모의 새 야구장을 짓기로 했으니 다소나마 위안이다. 그런데 첫 삽을 뜨기 전 시와 공사비 500억원을 부담하는 삼성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견해차에서 오는 밀고 당기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혹여 서로 주장만 고집하다 개장이 지연된다면 여태껏 즐길 권리를 빼앗긴 채 인내해 온 대구의 야구팬들이 또다시 참고 하소연만 늘어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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