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투견도박 횡행] <하> 판돈 걸고 이전 투구…모두가 빈털터리

입력 2012-10-26 10:50:33

투견계 지존 놓고 견주들 2억 판돈 승부

올 4월 말 대구 북구 연경동에서 벌어진 도사견
올 4월 말 대구 북구 연경동에서 벌어진 도사견 '조폭'과 핏불테리어 '황소' 간 싸움 장면. 대구 북부경찰서 제공

국내 투견계가 갈등에 휩싸였다. 수십 년 동안 불법 투견 도박계에서 잔뼈가 굵은 관계자들이 최근 한 투견 경기를 계기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검찰이 사건을 조사해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으며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수사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사기 도박

투견계가 갈등을 일으킨 사건은 올 4월 말 대구 북구 연경동의 한 청둥오리 축사 마당에서 벌어진 계약 게임. 이날 경기에서는 투견으로 전국적 명성을 지닌 '조폭'이라는 이름의 도사견과 투견계의 황제를 노리는 '황소'라는 이름의 핏불테리어가 맞붙었다.

당시 J(39) 씨가 프로모터를 맡기로 하고, 도사견의 공동 주인인 R(63)'P(54) 씨, 핏불테리어의 주인인 K(35) 씨 간 사전 계약을 했다. 계약 내용은 ▷양측이 각각 1억원씩 총 2억원짜리 게임을 하고 ▷도사견은 40㎏을 넘으면 안 되고, 핏불테리어는 32.5㎏을 넘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계약금으로 양측은 1천만원씩 걸었다.

도사견 측은 판돈 1억원을 채우기 위해 평소 투견판을 기웃거리던 10여 명을 모았다. 한 관계자는 "계약에서 정한 판돈 1억원을 만들지 못하면 게임 포기로 간주되는 탓에 여러 사람을 모아 겨우 판돈을 채웠다"고 했다. 핏불테리어 측은 견주 K씨 혼자 5천500만원을 걸었다. 도박자금 수금은 J씨의 후배 L(37) 씨가 맡았다. 공식적인 판돈 외에 비공식적인 판돈인 '뒷방'도 억대가 걸렸다. 한 관계자는 "뒷방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공식적인 판돈보다 규모가 더 크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투견장 밖에서 초시계로 시간을 재는 부심은 60대의 H씨가 맡았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H씨는 30년 이상 투견계의 프로모터로 활동한 거물(?)로 통한다.

4월 26일 경기장에 모인 인원은 10여 명. 경기는 27일 0시부터 1시 10분까지 70분간 벌이기로 했다. 싸움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조폭'과 '황소'는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격렬하게 맞붙었다. 죽기 살기로 서로의 목덜미를 겨냥해 물고 또 물었다.

투견계의 지존을 걸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진 것. 판돈 2억원의 거금이 붙은 탓에 견주와 투자자들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경기 시작 50여 분이 지나면서 도사견이 약간 밀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도사견이 뒤로 약간 물러서자 심판이 호루라기를 강하게 불며 이른바 '하도리'를 선언했다. 도사견이 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싸우던 개들을 떼어냈다.

그러자 도사견의 견주와 투자자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세 발짝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5분여 동안 도사견 측과 심판이 강한 언쟁이 벌어졌다.

결국 심판이 '미스'를 시인해 재경기를 결정했다. 하지만 싸움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도사견이 싸움을 거부한 것이다. 도사견은 평소에도 싸움 도중 중단되면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는 습성이 있다고 관계자들은 밝혔다. 승리는 핏불테리어 '황소'에게 돌아갔다.

투견계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도사견 측 견주와 투자자들이 승부조작을 의심한 것. 평소 도사견이 두 번 싸우지 않는 습성을 알고 있던 심판이 이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하도리'를 선언해 싸울 의지를 꺾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도사견 측 관계자들은 프로모터인 H씨와 J씨가 황소의 실제 견주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고 있다. 도사견 측의 한 투자자는 "완전히 사기였다. 정정당당한 승부가 벌어지지 못했다"며 "주최 측과 핏불테리어 주인이 짜고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십 년 동안 투견계에서 잔뼈가 굵은 도사견 측 투자자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자 골머리를 앓던 프로모터 측이 잔꾀를 냈다. 판돈을 양측이 합쳐 4천500만원으로 축소해 4월 자진해서 대구 북부경찰서에 제보한 것. 북부서는 5월 말 투견 주인 K씨와 R씨, 불법 도박장을 개설한 J씨, 판돈 관리자 L씨 등을 불구속 입건해 검찰로 송치했다.

검찰은 도사견 측 관계자의 제보를 바탕으로 5월 중순부터 이 사건을 수사해 오던 중 가담자가 20명이고, 판돈도 양측이 합쳐 1억1천만원이라는 것을 밝혔고, 프로모터인 J씨와 도사견주 R씨, 핏불테리어 주인 K씨를 구속기소했다. 도사견의 다른 견주 P씨를 불구속 기소했고, 판돈 관리자 L씨와 투자한 S씨 등 10여 명은 벌금을 부과했다.

대구지방법원은 8월 14일 J씨에 대해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1천만원, R씨에 대해 징역 1년에 벌금 200만원, K씨에 대해 징역 1년에 벌금 200만원 및 추징금 1억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J'R'K 씨 등 3명은 판결에 불복해 9월 20일 항소를 했고, 검찰도 항소를 한 상태다.

◆축소 수사

검찰이 관련자를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 약식명령청구 등으로 처벌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도사견 측 관계자들이 '축소 수사' 의혹을 제기하며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검찰이 2억원이던 공식 판돈을 1억1천만원으로 축소했고, 이번 투견 경기의 실제 몸통인 J씨에 대해 별다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도사견 측 견주와 투자자에게는 구속 기소 또는 벌금형을 내리면서도 핏불테리어 측 견주와 투자자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했다는 것이다. 또 수억원이 걸린 '뒷방'에 대해서는 별다른 수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도사견 측의 한 관계자는 "이번 기회에 불법 투견도박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며 "검찰이 공정하고도 강력하게 처벌을 해야 하는 데도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사견 측 관계자들도 불법 투견 도박에 연루된 탓에 사건이 확대되면 자신들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데도 굳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뭘까? 이 사건으로 벌금형을 받은 도사견 측의 한 인사는 "30년 이상 불법 투견을 했지만 이번처럼 승부조작이 벌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내가 더 강한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투견계에서 벌어지는 승부조작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투견계의 거물이자 이번 경기의 몸통인 H씨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이 같은 승부조작이 계속 벌어질 수 있다"며 "검찰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도 "투견도박의 끝은 결국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다. 투견계에 몸담았던 수백 명이 알거지가 되면서 H씨만 대회를 주최해 돈을 버는 구조가 됐다"며 "투견 전체를 뿌리 뽑아야 하고 이것이 어렵다면 H씨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판돈은 계약 당시 2억원이었지만 실제 모아진 돈은 1억1천만원에 불과했고, 사기도박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 H씨는 지난달 28일 도박장 개장 혐의로 불구속기소했고, 뒷방 모집책에 대해서는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며 "프로모터인 H씨와 J씨가 황소의 실제 견주라는 주장은 증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양측 모두 전문 도박꾼들인데 사기 도박이 통하겠느냐"며 "패한 쪽이 억울하니까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기획취재팀=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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