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백일장] 50대의 가을 어느 날/남편과 고구마/ 신행 가던 날/ 존재의 이유

입력 2012-10-26 07:36:22

♥수필1-50대의 가을 어느 날

어느덧 가을이고 어느 날 하얀 눈이 오겠지!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고 여름인가 싶더니 가을이다. 이 가을 아름다운 계절을 음미하기 전에 또 어느 날 겨울이 찾아오겠지. 나이 쉰이 되기 전에는 아픈 곳 한 번 없었는데 작년부터는 감기도 심하게 앓았고 문득문득 내 몸이 녹초가 되곤 한다. 우리 가족은 시아버님 93세, 남편 52세, 나 52세, 큰아들 26세, 작은아들 24세 모두 5명이다.

남편과 나는 맞벌이 부부이다. 남편은 회사를 다니고 나는 작은 가게를 혼자 운영하고 있다. 결혼하기 전에는 3남 2녀의 막내딸로 밥 한 번 안 해보고 결혼했는데 시집와서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한 지도 26년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이름으로 한 남자의 아내로 묵묵히 나의 길을 가야 했다.

시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집안일을 많이 거들어 주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년 6개월이 되었다. 그래서 집안일도 아버님 뒷바라지도 모든 것이 내 몫이 되었다.

나의 봄날이 그립고 그립다고 툴툴거리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남편이 말했다. "내가 근사한 데 가서 외식시켜줄게!"

남편의 말에 큰 힘이 난다. 50대의 가을 어느 날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원용순(경산시 압량면 현흥1리)

♥수필2-남편과 고구마

남편이 퇴근길에 고구마 5천원어치를 사왔다. 며칠 전 함께 가서 구입한 고구마가 맛이 있어 그곳에서 다시 사왔다기에 나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씻다가 보니 고구마가 새들새들 곯고 썩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시장에 가서 이런 것은 팔지 말라고 이야기해보겠노라고 씻다 만 고구마를 검은 봉지에 넣어 나갔다. 조금 후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돌아왔다. 남편은 "이상한 아주머니도 다 있어. 바로 가져오지 않고 물로 씻어서 바꾸어 주지 못한다며 짜증만 내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하더라"고 하며 화가 나 있었다.

이젠 중년이라 늘 자상한 남편인데 젊은 시절 버럭 화를 내며 공중을 향해 주먹 펀치를 날리곤 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계속 화를 내고 있었다. "계속 화내면 당신만 손해죠. 고구마 판 아주머니께 5천원 기부했다고 생각하고 화 풀어요. 내일 퇴근하는 길에 다른 가게에 가서 싱싱한 고구마로 내가 사가지고 올게요" 하며 겨우 어린아이 달래듯 남편을 달래 화를 풀게 하였다.

나이 들면 모두가 어린애가 된다고 했던가, 아이 같아진 남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스워 저녁 설거지 내내 혼자 웃었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 들어 가나보다.

노태수(대구 달서구 송현2동)

♥시1-신행 가던 날

딸이 남의 가문에 가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어머니는 다 그럴 것이다

결혼식 올리고 한 해를 묵고

신행 가던 날

어머니는 겉밤을 한줌

치마 말기에 넣어 주며

저녁에 시어머니 드려라

신행 첫날은 시어머니 곁에 자거라

동기간 우애 있게 지내라

갈 때는 부엌 뒷문으로 나가

뒤안길 둘러 골목길로 나가거라

여러 가지를 일러주셨다

뜻이나 이유 같은 것은

지금도 모른다

글이라고는

사랑방에서 배운 것이 전부인데

83세에 생을 마감하시어

말씨, 솜씨, 마음씨, 다 같이 잠드셨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잘 살았습니다

말씨 마음씨 간직하고

제 마음 흐트러질 때면

어머니 말씀 이명으로 왔지요

이정자(김천시 황금동)

♥시2-존재의 이유

오늘 누군가와 아름다운 대화를 해야 하고

인연이 닿는 사람과 미소를 나누어야 하며

사랑해야 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인지언정

나는 그런 이유로 행복에 가득합니다

해야 할 일들이 많기에

무엇을 주어야 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

난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이유입니다

한 폭의 미소

단 한 사람에게라도 전해져

세상에 미소 짓는 얼굴

한 명이라도 늘어나기를

그러므로 모두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장명희(대구 달서구 이곡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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