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 숨을 고르다] (43) 탑은 떠나고 절 터만 남은 갈항사

입력 2012-10-26 07:58:13

국립중앙박물관에 서 있는 국보 99호인 김천 갈항사 삼층석탑. 가을 햇살을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서 있는 국보 99호인 김천 갈항사 삼층석탑. 가을 햇살을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갈항사 터에 비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는 불상.
◆갈항사 터에 비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는 불상.
◆3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있는 표석.
◆3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있는 표석.
◆오봉리에 있는 보물 제245호 석조석가여래좌상. 코 부분이 다 닳아 있는 모습.
◆오봉리에 있는 보물 제245호 석조석가여래좌상. 코 부분이 다 닳아 있는 모습.

바야흐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이다. 햇살이 따스하던 시월의 휴일날 오후,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맑게 갠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박물관은 연인과 가족 단위 관람객으로 붐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에 있다가 용산에 있던 미군 헬기장이 옮겨 가자 지금 장소에 터를 잡았다.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 연못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석조물 정원'이란 푯말이 서 있다. 정원에는 '남계원 칠층석탑'이 위용을 뽐낸다. 높이 7.54m, 국보 제100호로 원래 경기도 개성시(開城市) 덕암동(德岩洞)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칠층석탑을 지나면 삼층석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이다. '갈항사 쌍탑'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99호로 원래 김천 남면 오봉리에 있던 석탑인데 일본으로 반출되는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통일신라 석탑으로 조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모습이다. 제자리에 있지 않아 못내 아쉽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김천시 남면 갈항사(葛項寺)를 찾았다. 김천을 흔히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한다. 갈항사는 '삼산'(三山)의 하나인 금오산(金烏山) 자락에 있다. 금오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사는 명산이자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길지로 잘 알려져 있다. 김천에서 바라보는 형상은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갈항사를 찾는 길목에선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벼를 추수하는 기계음이 정겹다. 경내로 접어들자 금오산 정상으로부터 붉게 물든 단풍이 하산할 채비를 하고 있다. 붉게 물든 산이 제철을 만나 눈을 간지럽힌다.

갈항사는 금오산 서편 골짜기인 남면 오봉리 갈항마을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예전 이곳에는 칡이 많아 '칡 갈(葛)'자를 써서 갈항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입구 왼편의 좁은 길을 따라 500여m 남짓 오르면 작은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자두밭 사이로 들어앉은 폐사지 보호각 안에는 보물 제245호 석가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다.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는데 이마저도 농경지로 변했다.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느낌이 든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고찰

오봉리 갈항사는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돌아온 승전대사(勝詮大師)가 692년(효소왕 1년)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사찰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난다. "승전이 개령군(현재의 김천시 남면 일대)에 절을 짓고 돌멩이 80여 개를 모아 화엄경을 강연했다. 돌이 지금도 전하는데 영험한 이적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갈항사는 조선 중기까지 사료(史料)에 실린 것으로 보아 사세(寺勢)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돼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된다. 갈항사는 폐사되기 전에는 금오산 약사암과 북삼의 굴암사 등을 산내 암자로 거느린 대찰이었다.

폐사지 중앙의 금당 자리에는 보물 245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눈'비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보호각 안에서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부처는 사찰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5m의 높이로 비슷한 시대에 조성된 불상들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다.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 이목구비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불상이다. 특히 잘록한 허리 곡선을 따라 신체에 밀착된 부드러운 옷의 윤곽은 천 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삼각형의 코는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숱한 아낙들의 손때를 타 검게 물들어 있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양손이 훼손되고 일부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 소박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석가여래좌상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일제강점기 초까지 두상만 노출된 채 땅속에 묻혀 있다가 마을 주민들이 발굴하여 초가집을 지어 모셔오다 1978년에야 지금의 보호각을 세웠다. 보호각 오른쪽에는 또 다른 불상이 금오산을 등지고 철창 속에 갇혀 있다. 부처의 진신으로 세상의 진리를 밝힌다는 비로자나불이다. 두상은 근년에 다시 붙인 듯 어딘지 어색하지만 비로자나불 특유의 지권인을 한 모습이 당당하다.

갈항사를 창건한 승전대사가 화엄경을 설파했던 화엄종 고승인 점을 감안할 때 갈항사의 금당에 모셔졌던 원래 주불은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신라 38대 원성왕은 당시 화엄종 교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왕이 된 후 여타 불교 교단을 장악하기 위해 화엄종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폐사지 곳곳에는 우물과 건물자리 축대, 초석, 기와편이 산재해 있어 옛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김천을 떠난 김천의 국보 갈항사 삼층석탑

보호각 앞 자두밭에 들어서면 원래 탑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양쪽에 서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99호인 갈항사 삼층석탑이 서 있던 자리다. 그나마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고 있어 다행이다. 탑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타 지역은 떠도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아픔과 관련이 깊다.

일제강점기 문화재 연구를 핑계로 수많은 일본인 사학자들이 한반도로 건너왔다. 1916년 6월, 김천을 돌아보던 일본인 학자들은 탑의 정확한 연대가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 이 탑의 금석학적 가치를 간파한다. 이들은 같은 해 2월에 벌어진 도굴 사건을 빌미로 탑을 서울로 옮겨 경복궁 내의 총독부 박물관에 보관했다. 광복 직전 왜인들이 탑을 일본으로 밀반출하기 위해 인천부두까지 기차로 실어갔으나 반출에 실패해 부둣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 1962년 국보 제99호로 지정했다.

◆명문이 새겨진 유일한 탑

갈항사 탑의 역사적 가치는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이다. 우리나라 탑 중에서 유일하게 조성 연대를 비롯한 건립 경위가 밝혀진 사례라는 것이다. 동탑 기단부에는 '두 탑은 천보17년(758년) 경신대왕의 어머니 소문황태후와 여동생, 오라비 언적 등 3인의 발원으로 세웠다.'(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姉妹三人業以成在之者靈妙寺言寂在思旅??姉者照文皇太后君在旅??妹者敬信大王在也)고 기록돼 있다. 경신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이며 소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를 말한다. 시호인 원성왕이 아닌 경신이란 이름을 사용한 점을 보아 785~798년 사이에 명문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김경신이 왕이 된 후 그의 외척들이 집안의 원찰이었던 갈항사에 등극을 기념해 추가로 불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 추가 불사는 탑을 금동판으로 장식하는 불사였다. 이는 탑 전면에서 볼 수 있는 일정한 간격의 못 구멍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사례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로 갈항사 탑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금오산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갈항사 쌍탑을 비치는 화려한 장관은 왕실의 원찰인 갈항사의 위엄을 한껏 높였을 것이다.

탑명에서 보이는 재지(在之), 재려(在旅), 재야(在也) 등 이두문자(吏讀文字)는 이두문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향토사학자 문재원 씨는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유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갈항사 탑을 김천으로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불가하다는 답을 받았다"며 "탑의 주인은 우리다. 선조들이 여기서 생활하며 필요성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탑의 반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원래 자리에서 보존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김천 내 직지사나 청암사 등 사찰에 옮겨 와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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