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기형도의 '10월' 중에서).
10월이 깊었습니다. 해질 무렵,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무척이나 쓸쓸했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꿈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면서 그대로 멈춘 채 머물렀습니다. 아직도 내 것이 되지 못한 공허한 바람(願)들이 바람(風)처럼 사라졌습니다. 불면의 밤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멸의 생각들입니다. 나의 희망은 잠깐 스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희망은 내 몸부림이었고, 내 흔들림이었고, 내 절망이기도 했습니다. 시간 앞에 멈춰 선 내 희망이자 절망은 언제나 같은 얼굴로 거기에서 쓸쓸했습니다.
자주 내 언어의 심지를 낮추었습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거르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는 건 부끄러움이자 만용이었습니다. 내 언어이기보다는 그들의 언어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내 언어는 3인칭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여전히 1인칭에 머물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事物)을 객관화하기에는 아직 내공이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먼 기침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잠들기 전보다 무거운 머리 때문에 아침이 쓸쓸했습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를 나는 아직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시작하기만 하고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 분명 10월인데, 가을은 깊었는데, 여전히 난 물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하고 그물만 던지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는 건, 특히 잘 사는 건 정말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저만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걸어온 길보다 더 많은 길이 남아 있더라고요. 이제는 숨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온 길보다 더 높은 고갯길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언젠가 누군가가 그랬었지요. 흘러가는 물은 강요하지 않아도 흐름에 따라 길을 만든다고요. 그런데 사는 게 어디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맡기기가 쉬운가요. 언제나 무너지는 담벼락에 기대고 있다는 절박함으로 살기도 했고요, 불어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절실함으로 살기도 했고요,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상실감으로 살기도 했고요. 내 삶을 가린 것이 어쩌면 내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으로 살기도 했지요. 생채기가 남긴 옹이도 언제나 내 길 위에 있었더랬지요.
알고 보면 내 삶만이 아니라 모든 삶이 물 같지는 않았지요. 이 세상에는 상처 없는 삶이 없다는 그것이 오히려 나를 위로하기도 했지요. 기다림은 언제나 나를 지치게 했고, 그리움은 반복해서 나를 절박하게 만들었지요. 그럴 때마다 다시 기대하면서 꿈을 만들었지요. 내일 걸어가는 길은 오늘과는 다를 거라고 믿음이란 놈을 키웠지요.
하지만 언제나 그 꿈의 끝은 만날 수가 없었지요. 이따금 길을 걷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발버둥이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할 때도 많았지요. 절박함이 절박함으로만 그치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반복되었지요. 그렇지요. 나는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에 닿고 싶었지요. 그것이 기다림인지, 그리움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건 진짜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어느 낯설지 않은 강변에서 주인공 영호가 순임에게 쑥부쟁이를 꺾어 줍니다. 영호가 이 강변이 낯설지 않다고 하자 순임은 이렇게 말합니다. "꿈을 꾼 것이겠지요. 그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꾸는 그 꿈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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