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세 치 혀만 살아 있는 나라

입력 2012-10-15 11:15:12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사람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쏟아내는 '말'들만 모아 들으면 대한민국이 당장 유토피아가 될 것 같다.

유토피아는 496년 전 토머스 모어가 어느 어부로부터 들었다는 섬나라 얘기를 쓴 소설 속의 이상향(理想鄕)이다. 유토피아에는 가난이라는 것이 없고 하루 노동시간은 6시간이면 충분하고 군대나 병사도 없으며 전쟁도 않기로 약속돼 있다. 금, 은, 보석도 한낱 장난감일 뿐, 물질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모든 재산과 물건은 공동소유로 풍족하게 나눠 쓸 수 있는 무상복지 천국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모어는 그런 꿈같은 나라의 이름을 왜 하필 '유토피아'(Utopia)라 지었을까. 유토피아는 그리스 말로 우(Ou=없다는 No)와 토포스(Topos=장소라는 Place)를 합친 말로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꿈속의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도 지금 대한민국은 대선 주자들의 입술 덕분에 유토피아가 돼가고 있다. 무상복지, 경제 민주화, 등록금 할인, 전면 무상급식, 고성장, 막강 안보와 사회 통합 등 대선 후보들의 말대로라면 무엇이든 안 되는 게 없는 나라가 된다.

그런 낙원이 가능한가. 국민들을 꿈속으로 끌고 들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또는 실현될 수 없는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 나라 건설을 약속하는 유토피아 공약은 언젠가 곧 모두에게 독이 된다. 언행일치와 실천 가능한 대안은 모호한 채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계산이 안 나오는 선심 공약이 남발되는 유토피아는 위험하다. 북한에 퍼주는 건 비판하면서 내게 퍼주겠다는 사람들에겐 연호하며 끌려들어 가는 대중심리는 더더욱 위험하다.

지금 이 나라는 지도 계층일수록 신뢰와 행동보다는 세 치 혀만 요란히 살아있는 나라가 돼간다. 연평도 포격 후 '적(북한)의 공격엔 단호히 응징하고 도발의 심장부를 분쇄하겠다'던 국방장관의 말에 '이제 안보 하나는 제대로 돌아가겠구나' 믿었던 국민이다. 그런데 최전방 철책선이 코미디처럼 뚫렸다.

하기야 국군 최고 통수권자(노무현 전 대통령)가 'NLL은 어릴 적 땅따먹기 할 때 땅에 줄을 그어놓고 네 땅 내 땅 그러는 것과 같다' 했던 나라였으니 그 분위기가 10년 지난들 어디 가겠는가. 군 기강 해이의 씨앗은 노 전 대통령이 땅따먹기를 말할 시절부터 잉태됐다.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사실이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고인이 된 주군의 말시비를 놓고 옛날 비서실장이 지금 와서 무얼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혀는 머리가 모르는 것을 지껄인다'는 러시아 속담이 떠오른다.

안철수 후보는 어떤가. 그는 그의 저서에서 '군 복무 시절은 인생의 공백기였고 엄청난 고문이었다'고 썼었다. 그런 국방 의식을 지닌 자가 군 통수권자가 되겠단다. 입마다, 나오는 말들마다 수미(首尾)가 맞지 않고 헤프다. 심지어 철책이 뻥뻥 뚫리는 판에 한 술 더 떠서 군 복무 기간 추가 단축까지 내걸었다. 유토피아 속의 군대 없는 나라의 꿈을 그려 보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대기업(포스코)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계열사 문어발 확장에 간접 동참하며 수억 원의 보수를 받고도 선거 공약은 재벌 개혁과 규제를 말하는 것도 앞뒤 안 맞는 말의 잔치다.

'조부로부터 도움 안 받았다'던 말도 18년 전에 공시지가만 2억 원이 넘는 땅과 주택을 증여받은 사실이 들통나고서야 '이번에 알았다'고 말했다. 증여 시점이 고교생 때와 대학생 때인데 그 나이에 수억 원 재산을 공짜로 받은 걸 몰랐다는 변명,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거기다 손에는 낡은 정치를 깨자는 깃발을 들고서 무대 뒤로는 남의 당(黨)에서 변절하고 넘어온 철새 정치인을 영입하며 '참 맑고 선한 힘이 더해졌다'고 했다고 한다. 낡은 정치의 폐습을 빼다 박은 탁한 정치 따라하면서 무엇이 참 맑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세 치 혀만 살아 설치는 공상소설 같은 유토피아의 허상에 휩싸여 가는 듯하다. 이 위험한 혀의 자유 시대를 슬기롭게 넘기려면 복지, 개혁, 안보 등 유토피아를 외치는 세 치 혀의 말 홍수 속에서 국민의 가려 듣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 세 치 혀에 홀려 말춤이나 추며 덩달아 장단 맞추다가는 앞으로 5년, '혀 빠지게' 고생바가지 덮어쓴다.

김정길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