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칼·볼펜… 마음 가는 대로 쥐니 자유, 거기서 참된 美의 세계
묵향을 벗 삼아 50년 째 붓을 들고 있는 민영보(66) 동보서화연구원 원장. 동보는 민 원장의 호이다. 그는 서예가이면서 화가이자 빼어난 시인이고 조각가다. 50년 전 화선지 위에서 시작된 그의 붓길은 그대로 각(刻)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회화와 시의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서예가의 일탈 정도가 아니라 시'조각 등의 분야에서 장인이나 달인 혹은 최고 경지에 도전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시(詩)'서(書)'화(畵)'각(刻)이 하나가 된 사람. 4색조의 매력을 가진 그를 만났다. 흑과 백의 가장 단순한 색 속에서 평생을 살았왔지만 여백의 흰색처럼 모든 색을 품고 있었다.
◆1인 4색
대구 동구 신천동 세동병원 맞은편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동보서화연구원. 그의 삶터이자 일터다. 모든 것이 현란한 색깔로 반짝이는 밖의 세상과 달리 흑백의 세계다. 지필묵과 여기저기 걸려있는 붓글씨에는 색이 없다. 인터뷰를 위해 연구원 한켠에 마련된 그의 개인 작업실에 들어서자 다시 화려해진다.
벽에는 서예작품과 동양화. '붉은 립스틱'(인주)을 바른 전각들이 가득하다. 성현의 가르침부터 자신이 지은 시, 친구와 나눈 인사말까지 정겨운 언어로 서와 그림과 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틈틈이 작업을 통해 하나 둘씩 탄생된 작품이다. 가늘고 여린 외양 탓에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칠순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세가 꼿꼿하다. 대나무 같은 민 원장의 모습도 작품의 일부다.
'한 우물을 파기도 힘들덴데 굳이 4가지 우물을 파는 이유가 뭘까'. 기자가 묻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낸다. "글씨만 쓰다보니 자연스레 그림에 욕심이 났습니다. 더구나 글씨와 그림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 동양화는 여백을 남기면서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멋스러움이 있지요."
연구원을 개원한 1985년대 이후에는 붓과 함께 칼을 들기 시작했다. 조각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것. 이치는 똑 같다. 돌이 종이고 칼이 붓이라는 생각에서다. "종이나 목재 혹은 돌 위에 붓으로 글이나 사군자 등을 표현한 서예나 서화가 1차 예술이라면 조각은 붓질에서 나오는 평면적인 흐름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3D 예술이라 할 수 있지요." 조각은 한번 손을 대면 다시 고칠 수 없는 분야라 칼을 잡을 때면 '스릴'이 느껴진단다.
맨 마지막에 도전한 것은 시다. "처음 붓을 잡고 몇십년 동안 선현들의 명시를 쓰거나 그림'조각으로 표현했지요. 그러다 문득 내가 직접 시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만의 추억들이 담긴 시를 짓고 붓으로 써서 남기는데 오랫동안 공을 들였습니다." 10여년 전부터 시의 분야에까지 도전한 그는 지난 9월에는 자신이 지은 302여수의 시를 전시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또 자음시(자작시) 서예 창작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쯤 되면 변신이 아니라 진화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글 하나 써주십사'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직접 써줬다. '고자낙지모'(苦者樂之母'고생은 즐거움을 탄생시킨다), '비인마묵흑마인(非人磨墨墨磨人'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 희긋희긋한 머리에 흰 종이와 검은 글씨, 빨간 낙관이 어우러지며 주위가 엄숙해 진다. 일필휘지다.
내친 김에 그림도 보고 싶어졌다. 화선지 위에서 붓끝이 경쾌하게 춤을 춘다. 휙 붓길이 내달리자 어느새 산과 구름, 바위가 생기고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 울굿불굿한 색깔로 치장하기까지 불과 5분 정도. 화선지 위에 아름다운 자연이 탄생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글과 조화를 이룬 편안한 그림. 복잡한 세상사 시름이 잠시나마 잊혀지는 듯하다.
이번엔 그가 미리 선수를 친다. 돌에 각을 뜨고 길을 내고 칼로 글과 그림을 각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땀이 맺힌다. 붓글씨와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달리 다소 힘겨워 보인다. 차가운 돌에 시와 그림을 새기는 일은 쉽지 않다. '도장 파는 일'쯤으로 치부했던 건 무지였다. "본디 서예는 붓글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서'화'각 네가지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특히 '각'은 나무나 돌 등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다듬기, 조각, 색칠 등 모든 작업과정이 매우 섬세하고 오묘해 문양과 색채 구성, 감각 등을 고려할 때 하나의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민 원장은 요즘 글씨를 쓰고 싶으면 쓰고 시나 전각을 하고 싶으면 볼펜이나 칼을 집어든다. 붓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하다보면 구속되지 않고 그러다보면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느낄 수 있단다.
◆농촌을 탈출하라
경북 청도군의 한 시골마을. 집 앞으로 개울물이 은빛으로 굽이쳐 흐르고 뒷산에 오르면 용각산이 가깝게 다가서는 곳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지만 자연은 그에게 풍부한 감성을 선물했다. 강과 산은 그에게 놀이터이자 배움터이기도 했다. 민 원장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고향의 강과 산"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어려서부터 글씨나 조각에 솜씨를 보였다. 15살 때부터는 학교 수업 후에 마을의 훈장님으로부터 밤마다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때 서예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가난과 농삿일은 서예가 대신 '농촌 탈출'을 일생의 목표가 되게 했다.
"어릴 때 꿈은 농촌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도 싫었지만 보리'논농사'밭농사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맘 때쯤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커녕 '저걸 언제 다 수확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지요."
18살이 되던 해. 그는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 가출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시생활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내공업회사에 취직해 생계를 이어갔지만 쥐꼬리만한 월급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후 한동안 친구집을 전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군대를 제대한 24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나서야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그동안 갈고 닦은 서예(?)가 큰 무기가 됐다. "첫 만남에서 아내에게 주소를 써 줬어요. 그 종이에 적히 글씨를 보신 장인어른께서 반듯한 글씨에 반해 결혼을 허락해 줬지요. '흔히 글씨를 보면 그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글씨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된다''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글씨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 장인어른의 생각이었죠."
결혼 후 한동안 멀리하던 붓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아내는 저의 예술 세계를 제일 잘 알아주는 친구였습니다. 가난할 때도 하루 10여 시간씩 서예에 몰두하는 저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부러울 게 없었던 그는 오래지 않아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대구서예대전, 경북서예대전에서 초대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붓을 든 사람은 행복한 사람
'붓을 든 사람은 행복하고 복 받은 사람이다'는 것이 그의 '붓 철학'이다. 가정이 편안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절대로 붓을 들 수 없으며 반대로 붓을 들게 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것.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매력이다.
"역사적으로 글씨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세상이 평안하고 온화한 시대였지요. 왕희지가 활동하던 동진시대도 가장 편안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반면 지금은 너무 바쁜 시대입니다. 천천히 살아가는 멋과 넉넉하게 살려면 넉넉한 곳에 가야하고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예가의 길이 편한 것만은 아니란다. "서예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서예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느낀 사람은 꾸준히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끝나지요. 화선지 한 장의 공간이나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점 하나 선 하나가 전부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자체가 공존이고 조화입니다." 그래서 원훈도 '고자낙지모'로 정했다. 고생은 즐거움을 탄생시킨다는 말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참맛을 느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공짜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이루었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글씨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서예인들은 '10년 이상 글을 썼다'고 하면 그제서야 '붓 좀 잡았구나'고 생각하지요."
◆서예 지킴이
4가지 분야에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붓글씨에 가장 애착이 간단다. 그에게는 조강지처와 같다. "그림은 몇 번을 덧칠할 수 있지만 글씨는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완성해야 하지요. 모든 게 머릿속에 미리 계획돼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림보다 수준이 높기 때문에 서(書)가 화(畵)보다 먼저 오는 거지요."
서예가 점점 외면받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오늘날 서예가 맞고 있는 위기는 어떤 면에서는 옛 것에 대한 몰이해와 시대정신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요. 앞으로 한글세대에 알맞게 한글에 담긴 새로운 미감(美感)을 발견하는 등 새로운 도전과 시대정신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서예의 일반화와 디지털화, 세계화를 위해 글자와 그 의미를 형상화 한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노력할 작정이다. "갈수록 서예가 사라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예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자연스레 선인들의 좋은 말을 접할 수 있고 마음도 순화시킬 수 있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절제력 또한 수양할 수 있습니다." 삶의 여유와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예술분야가 바로 서예라고 강조하는 민 원장의 서예사랑은 진행형이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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