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물·인적 통로 물리적 장소에서 지역발전 터전으로
'관문'(關門)이란 나라의 국경이나 지역 요충지의 통과 지점에 뒀던 문을 뜻한다. 그랬던 것이 요즘은 의미가 확장돼 '중요한 통과 지점'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그러면서 단순히 물리적인 모습의 문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관광자원, 지역 랜드마크, 역사 콘텐츠 등으로 성격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 시대 관문의 의미를 살펴봤다.
◆우리나라의 주요 관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문은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남대문)이다. 1396년(태조 4년)에 지어져 조선의 도읍 한양의 정문 역할을 했고, 지금도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이자 주요 관광자원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성문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은 태극기나 독도처럼 온 국민의 감정이 이입되는, 국가와 국민의 대표적인 정서 매개체 중 하나다. 2008년 2월 10일 화재가 발생해 숭례문이 무너졌을 때 다른 문화재 소실 사건과 달리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이뤄졌고, 사회적 반향도 컸던 것.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됐고, 올해 12월에 복원이 완료될 예정이다.
성의 관문인 성문 분야에 숭례문이 있다면 길의 관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문경새재의 3개 관문이다. 1414년(태종 14년)에 개통된 문경새재(명승 32호)는 조선시대에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지금의 '경부선' 역할을 한 '영남대로'에서 가장 유명한 고갯길이다. 제1관문은 주흘관, 제2관문은 조곡관, 제3관문은 조령관으로 불린다.
문경새재는 특히 경상도 선비들의 주요 과거길이었고, 관련된 수많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 인재의 절반이 영남지방에서 나왔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면 영남지방의 인재를 역사의 무대로 진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문경새재가 한 것이다. 이들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한 것이 바로 3개 관문이었다.
관문으로 사람은 물론 물자도 드나든다. 국내의 물자를 유통시키던 관문은 경제 성장기를 지나며 세계를 상대로 물자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맡게 됐다. 우리나라 최대 수출'입 관문은 부산항이다. 부산의 컨테이너항만은 2010년 기준으로 세계 5위 규모를 자랑한다.
문화를 담은 물자인 '문물'은 늘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맨 먼저 들어왔다. 바로 옆에 있는 수도 서울의 관문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에는 최초의 서양 문물 흔적이 꽤 있다. 최초의 서양식 호텔'극장'자동차공장'성냥공장 등이다.
지금도 인천은 우리나라의 첫 관문 역할을 맡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이 있기 때문.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관문 공항이었던 김포국제공항의 역할을 이어받아 1992년 문을 열었다.
바닷길이나 하늘길이 아닌 내륙의 주요 관문으로는 지리적으로 남한 중앙에 있고, 교통의 요지인 대전을 꼽는다. 일찌감치 경부선과 호남선이 통과해 '삼남의 관문'으로 불렸다. 이 지역은 특히 서울과의 접근성도 좋아 수도의 행정 역할을 분담하는 '세종시'가 자리하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구를 대표하는 관문은?
이렇듯 우리나라의 대도시는 저마다 특징을 담은 관문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대구의 관문은 어디일까? 하늘길은 대구국제공항이, 철로는 동대구역이 대표 관문이다. 대구시의 경계에 있는 주요 도로 관문지점인 고속도로 나들목은 북대구'서대구'동대구'남대구'수성'성서'칠곡'현풍나들목 등 모두 8곳이다.
그런데 다른 대도시가 보유한 관문과 비교하면 대구의 관문은 뭔가 평범하다. 그래서 대구의 대표 관문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동대구역 일대에 들어서 대구 최대 단일 건물이 될 것으로 보이는 동대구복합환승센터가 대표적이다. 백화점'컨벤션 등과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서는 센터를 짓는 데 올해부터 7천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인근에는 오피스텔 등 주거시설도 들어설 전망이다. 그러면서 서울역 다음으로 동대구역의 이용객이 많은 만큼 유동 인구를 상주 인구로 끌어들이고, 상권 기능과도 연결시키는 등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구시 관계자는 "하루 평균 20만 명의 유동 인구가 발생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역사적 관문의 복원도 이뤄지고 있다. 대구읍성 복원이 대표적이다. 1906년 일제가 일본인의 상권을 확보할 목적으로 성벽을 허문 것을 되살리겠다는 것. 성곽 사방에는 진동문'달서문'남문(영남제일관)'공북문이 있었고, 성벽 동'서쪽에 돌문이 하나씩 더 있었다. 그 안에는 조선시대 때 경상도 전체의 정치'경제'군사 분야를 관할한 경상감영이 있었다. 그러면서 단순히 관문의 물리적인 모습만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관광 콘텐츠를 녹여 넣는다는 계획으로 대구 중구청은 일대를 '근대 역사문화벨트'로 조성하는 사업을 활발히 추진 중이다.
◆우리 지역 관문의 역사
대구읍성의 성문들 말고도 우리 지역에는 다양한 역사적 관문이 있다. 흘러온 역사는 이렇다. (사)시간과공간연구소 권상구(38) 이사는 "영남지역의 관문은 처음에는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형성됐다"고 말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낙동강의 '나루터'가 주요 관문이었다. 그 영향은 1900년 3월 낙동강을 타고 사문진 나루(지금의 대구 달성군 화원)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들어온 사건까지 이어졌다.
"외국과의 무역도 낙동강을 타고 경상도 내륙 지역과 연결됐습니다." 경북 칠곡군의 '왜관' 지명이 그 증거다. 왜관이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회유책으로 조정에서 일본인들의 왕래와 무역을 허용하며 교역'접대'숙박 등에 관한 일을 맡긴 기관을 뜻한다. 처음에는 바닷가인 삼포(지금의 부산'울산'경남 진해)에 왜관이 들어섰으나 이후 교역에 낙동강의 수로가 이용되면서 강창나루 등이 활용됐고, 왜관도 들어선 것.
"관문이 수로에서 육로 중심으로 옮겨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영남대로가 그 무대였다. 대구 지역 안을 지나는 영남대로 구간의 입구는 지금 대구 동쪽의 신천 지역이었고, 출구는 지금 대구 북구의 노원, 원대 지역이었다. 대구 10경 중 하나로 영남대로의 주막이었던 '노원송객'이 대표적인 흔적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1박을 하고 북쪽인 지금의 경북 칠곡 지역으로 건너갔다.
권 씨는 "근대화 이후 유동 인구 및 물자가 급증하며 대구의 관문도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1900년 이후에는 대구역이 대구의 물자 및 여객 운송 관문이었다. 하지만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경부선 등을 활용한 물자 및 여객 운송량이 급증하며 더욱 규모가 큰 동대구역이 대구의 중심 관문이 됐다.
◆지역 발전 위해 '관문성' 회복해야
이후 관문은 기본적인 통로 기능에 더해 타지 방문자들이 지역을 인지하는 창구로도 기능하게 된다. 지역 이미지가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에 파급돼 경쟁력을 만드는 시대가 됐기 때문. 그러면서 관문의 위치는 지역 경계가 아닌 곳에도 자리하게 된다. 권 씨는 "동대구역이 대구를 사업 등 일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첫인상을 남기는 관문이라면 동성로는 주로 젊은 층이 대구를 방문해 지역 문화를 맛보는 관문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씨는 이러한 '관문성'을 회복하면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구가 근대로 뻗어나가는 기반이 됐고, 당시 경제'문화적으로도 중심 역할을 했던 '근대 플랫폼'인 대구 구도심의 관문 흔적을 복원하는 등 관문의 미래 역할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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