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애니팡만 한 대선

입력 2012-10-11 11:09:52

'타임 오버~' 종료를 알리는 비음 섞인 목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긴 귀를 팔랑대는 토끼까지 은근히 부화를 지른다. 제한 시간 60초를 다 써버렸으니 하트 또 하나 지우고 다시 같은 동물 세 마리 맞춰보는 수밖에. 출시 두 달 남짓한 기간에 1천700만 명이 내려받아 1천만 명이 매일 한 번 이상 접속하고 평균 54분간 즐긴다는 국민게임 '애니팡' 이야기다.

애니팡 중독 얘기까지 나오고 있지만 말 그대로 선풍적인 인기가 난리도 아니다. 30, 40대 절반 이상이 애니팡 물이 들었고 심지어 50대 이상 장년층도 게임 삼매경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한 손맛 때문일까. 양손 모두 동원하는 4차원의 신출귀몰한 솜씨는 언감생심. 둔하면 둔한 대로 요리조리 손가락을 움직이면 초라한 점수지만 애니팡은 그래도 팡팡댄다.

지극히 단순한 매치 게임인 애니팡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리 몰입하는 까닭은 뭘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요소는 쉽고 단순하다는 점이다. 게임 방법 그거 알아볼 필요도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닥치고 팡'이다. 누구나 바로 시작하면 될 정도로 직관적이다. 실시간 떠오르는 점수판도 재미 요소다. 소셜네트워크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등에 업은 탓에 내 전화번호부에 든 모든 사람들이 우군이자 경쟁자다. "김 팀장은 벌써 30만 점 넘었네. 이 아줌마가 16만 점이야, 나이를 거꾸로 먹나. 근데 난 아직도 고작 6만 점 언저리니 참 나 원…." 어쩌랴, 그래도 다시 팡이다. 어쩌다 용케 점수 쌓이고 순위가 홱 바뀌면 불꽃놀이까지 해주니 그 재미는 해본 사람만이 안다. 아무리 고득점 자랑해도 유통기한은 일주일.

이게 전부라면 애니팡은 그 흔한 게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애니팡은 마냥 기계와 씨름하는 밋밋한 게임도, 고립무원의 전투도 아니다. 내 네트워크의 모든 이에게 손 벌릴 수 있는 상호 의존성이 큰 무기다. 동전 넣을 필요도 없고 필요할 때 하트 하나씩 주고받으면 된다. 외신들이 시도 때도 없는 '하트' 구걸 때문에 갈등이 커지고 있다며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헛다리 짚었다. 한 번 해봐, 자기들이라고 별수 있을라고.

밑천이 떨어지면 적당히 물러서는 법도 가르친다. 하트가 고갈되면 긴급 수혈해줄 지인을 찾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기다리면 또 생긴다. 8분에 하트 하나. 그다지 집착할 일 많지 않은 중장년층이라면 쉬엄쉬엄 즐기면 된다. 이런 요소들이 애니팡을 국민게임으로 만든 매력이자 힘이다.

대선을 60여 일 앞두고 선거전이 치열하다. 우연찮게도 애니팡과 이번 대선은 많이 닮았다. 3의 조합이다. 박-문-안. 그런데 셋이 만나면 애니팡 점수는 오르지만 대선은 전혀 다른 캐릭터들의 경합이라 더 소란스럽고 열기도 뜨겁다. 고득점 순위가 뒤바뀌듯 지지율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엎치락뒤치락이다. 악재도 속출이다. 과거사 인식 문제에다 재산 문제, 경험'리더십 부족 등 저마다 약점에 발목이 잡힌다. 여당은 집안 싸움으로 바쁘고 야당은 야당대로 난리다. 전략공천 받은 야당의 초선 의원이 무소속 후보 진영으로 옮기면서 '아프다' '눈물이 난다'며 선문답인지 신파극인지 모를 소리까지 나온다.

역사 인식 논쟁에다 낡은 정치 청산이니 무소속 대통령 한계론이니 온갖 쟁점과 말들이 오가지만 유권자의 마음을 쏙 빼앗을 이슈도 재미도 없다. 후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보편적 복지나 일자리, 정의사회, 경제민주화도 해보지 않은 이상 공약(空約) 수준이다. 지금은 차별화를 외치고 있지만 정책은 방향과 실천 의지, 경제'사회적 여건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권력 쥐었다고 쉽게 되는 일도 아니다. 어차피 권력의 유통기한도 5년이다.

그래도 유권자들은 지금 애타게 빈부와 지역'계층 간 격차 해소라는 하트를 계속 날리고 있다. 그 판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자 실생활이고 가까운 미래다. 이제 후보들은 하트로 답장해야 한다.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선거여서다. 이번 대선은 기성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에게 선거하는 재미를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과거 대선과는 달라야 한다. 이번 대선이 애니팡에서 배울 것은 더 이상 정쟁이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과 상호부조로 진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선이 과거처럼 너는 죽고 내가 사는 끝장 대결이라면 애니팡보다 나을 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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