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봉 vs 우두봉, 성주-합천 가야산 정상놓고 신경전
성주는 경상남도 합천과 도계(道界)를 이룬다.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와 수륜면 백운리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와 야천리가 각각 경계를 맞대고 있다. 법전리의 경우 가야산 능선이 도 경계인지라 경계 인근에서 마을은 찾아볼 수 없지만, 경북과 경남을 각각 대표하는 칠불봉(1,433m)과 우두봉(1,430m)이 국립공원 가야산의 최고봉'정상 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치열하다. 백운리는 59번 국도가 야천리와 이어져 있어 도계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다.
◆자연촌락으로 형성된 도계마을 백운리
수륜면 백운리는 자욱하게 어리는 안개 때문에 마을 이름이 '백운'(白雲)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워낙 안개가 많이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가야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백운리는 학발'가라골'우수동'북두림'신촌, 솔티'진등'중기 등 8개의 자연촌락으로 형성돼 있다. 이 가운데 솔티마을은 조선 영조 때 배 씨라는 선비가 중기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나지막한 고개였던 곳에 터를 잡아 살게 되면서 솔티(松峴)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옛날 걸어다니던 길은 북두림-솔티-신촌-진등-나팔고개로 이어져 있다. 특히 솔티마을은 앞산이 경남과의 도계라 생활권이 합천군 가야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경남'북 경계와 가장 근접해 있어, 성주군 서변 첫 마을인 북두림은 마을 남쪽의 북두산(北斗山'692m)에 가야산 용기산성의 보조망루인 북다락(鼓樓)이 있어 북두산(鼓樓山)이라 하고, 북두림뫼(북다락뫼)가 북두리미→북두림으로 지명이 변화했다.
마을 앞에는 성주군에서 근래에 건립한 누정(樓亭)인 정견대(正見臺)가 있다. 정견대 표지석에는 "(전략) 가야의 건국설화와 같이 화합과 상생, 큰 고을 성주의 위용과 여기에 오른 모든 이들이 밝고 신령한 풍광과 운세를 가슴 가득 담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견대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정견대는 가야산이 그동안 문헌으로만 알려져 있던 가야의 건국신화가 깃든 장소임을 알려 주는 첨병 역할을 맡도록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오르면 도계 넘어 합천군 쪽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를 돌아보면 성주 쪽 가야산의 수려한 산세가 감탄과 감동을 자아낸다.
반대쪽 경남 땅은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전골(廛谷) 마을인데, 옛날 사기그릇을 굽는 전(廛)이 있었다 하여 전골이라 불렸으며, 운동(雲洞) 또는 원운동(元蕓洞)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 이 마을은 청기와산장 모텔과 서경 고시원 등 6, 7개 업소가 내방객을 맞을 뿐, 일반 민가는 찾아보기 힘들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성주 법수사 VS 합천 해인사
언제부터인가 가야산은 '합천 가야산'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야산 탐방객을 대상으로 식당 등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백운리 주민들에게는 도계를 넘어 가야면 홍류동 계곡과 해인사로 줄지어 이동하는 차량을 바라보는 심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합천 가야산'이란 인식은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을 가지고 있는 해인사 때문이었을 것이고, 맑은 물이 흐르는 홍류동 계곡 또한 일조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중기마을에 있었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법수사(法水寺)는 한때 구금당팔종각(九金堂八鐘閣)일 정도로 많은 전각과 암자를 거느려 해인사에 버금가는 대사찰로서 위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지(寺址)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만을 남긴 채 소실돼 명맥마저 찾기도 어렵다.
두 사찰의 운명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법수사의 본전에 모셨던 비로자나불상과 두 협시보살이 지금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것이다. 법수사의 비로자나불상과 두 협시보살은 1897년 해인사의 범운(梵雲) 스님이 옮겨 모신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부처님을 옮겨갈 때 고개를 넘던 중 갑자기 불상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아 범운 스님이 직접 예불을 올리자 불상이 다시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해인사로 불상을 옮겨 모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당시 성주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든 전설일 듯싶다.
대사찰이었던 법수사가 옛 위용을 그대로 갖고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면 해인사가 합천 가야산으로 여겨지도록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성주 가야산'에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성주 사람이라면 이심전심일 것이다.
◆가야산 정상 쟁탈전, 성주 칠불봉 VS 합천 우두봉
1999년, 당시 김용판(현 서울지방경찰청장) 성주경찰서장은 정상을 30여 차례나 오를 정도로 가야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김 서장은 남들은 걸어서도 힘들다는 가야산을 뛰어서 오르내리는 강철 체력으로 유명했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가야산을 오르내리던 김 서장은 어느 날부터 칠불봉이 우두봉보다 더 높은 것 같다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의문이 일자 그는 곧바로 의문 해소를 위한 행동에 나섰다. 성주군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칠불봉과 우두봉의 높이를 정확히 측정해 달라는 공문을 보낸 것. 당시 가야산의 최고 정상은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우두봉이었다.
칠불봉 높이를 측정해 달라는 공문을 접수한 성주군청 이상옥 지적과장은 군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로 고도를 측정해 칠불봉이 우두봉에 비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성주군은 국립지리원에 정식으로 칠불봉의 높이 측정을 의뢰했고, 1,433m라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칠불봉이 우두봉보다 3m나 더 높은 가야산의 최고봉이란 사실이 드러나자 김 서장은 "칠불봉이 가야산 최고봉으로 확인된 만큼 이제부터라도 칠불봉이 주봉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각계에 촉구했다. 그는 또 "가야산은 신령스런 기운을 간직한 산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 좋은 기운을 받아가기 바란다"고 가야산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칠불봉 높이가 1,433m라는 사실이 확인되고부터 4년 후쯤인 2002년,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을 즈음 성주군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한 장의 공문이 날아들었다. 공문 주요 골자는 '국립공원에 구조물을 설치하려면 신고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성주군이 설치한 표석은 이런 법 절차를 무시한 불법구조물이므로 철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일은 칠불봉 높이 측정 후 성주군이 성주산악회를 내세워 칠불봉에 정상 표석을 설치하면서 불거졌다. 1.5t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표석 앞면에는 '七佛峰 1,433m', 뒷면에는 '慶尙北道 星州郡 加泉面 法田里 山 162番地'가 음각돼 있다.
하지만 성주군은 대한민국 산에 정상 표석을 설치하면서 절차를 지켜 설치한 사례가 없다며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요청을 무시했다. 성주군이 이같이 결정한 것은 합천군이 "국립공원에 불법으로 설치한 구조물을 방치한다"며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후 합천군도 우두봉에 표석을 설치하면서 칠불봉 표석 철거 건은 유야무야됐다.
칠불봉 정상 표석을 설치했던 성주군청 이수열 주민생활과장(당시 기획담당)은 "칠불봉이 우두봉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자 합천군은 정상을 성주군에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고, 타개책으로 불법 표석을 철거하라는 압력을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행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성주'이영욱기자 hell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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