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판공비'를 아십니까?

입력 2012-10-09 07:43:17

1980년대 얘기다. 초년생 검사 동기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부부 동반 모임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모임은 두 번으로 끝이 났다. 이유는 판공비 때문. 첫 번째 모임에서 나온 자신의 술 관련 얘기로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던 한 검사가 두 번째 모임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판공비' 얘기 때문에 곤욕을 치르자 '비밀유지가 되지 않는다'며 부부모임을 없애 버렸다.

판공비란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두 번째 모임 당시 한 검사의 부인에게서 판공비 얘기가 나왔고 판공비 구경은커녕 판공비 존재조차 몰랐던 다른 검사의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판공비에 대해 따져 물은 것이다.

"여보, 판공비가 뭐예요? 누구네 집은 매달 판공비라며 10만원씩 갖다준다는데요?"

아내의 가시 돋친 질문에 위기를 느낀 검사 남편은 기지를 발휘해 겨우 위기를 모면했고, 다시는 모임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거요"라며 운을 뗀 뒤 "사실 판공비는…바로…판사에게 공작하라고 조직에서 몰래 주는 비용이오!"

'판'공'비'가 '판사 공작 비용'이라니 발상 자체가 기막히고 재밌다. 그 당시 그 모임의 일원이었던 현직 검찰 고위간부는 "당시 검찰에서 판공비라며 매월 10만원을 줬는데 일부는 타이피스트에게 수고비로, 일부는 부서 경비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그 10만원을 고스란히, 그것도 판공비라고 이실직고하고 매달 꼬박 아내에게 갖다줬고, 부부모임에서 얘기하면서 사달이 난 것"이라고 부연 설명해 줬다.

물론 '검사가 판사에게 공작하는 돈'은 당연히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자존심상 판사에게 공작할 검사도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판사와 검사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야만 할 수 있는 직업이지만 판사와 검사로 갈리는 순간 길을 달리한다. 검사는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범죄, 사건을 다루며 칼을 휘두르고, 판사는 수사 기록 등을 통해 최종 판단, 결정한다.

이러한 업무 때문에,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판사와 검사의 성향 차이도 크다. 판사는 사건의 종결, 판단의 최상위에 있는 '결정자'라는 자존심이 강하고, 검사는 '무생물을 다루는 판사와 달리 검사는 생물을 다룬다'며 우월성을 자랑한다.

판사는 '법정에선 내가 왕'이라는 자부심, 검사는 '세상에 무서운 존재는 국회의원 보좌관뿐'이라며 최고 권력을 뽐낸다. 판사, 검사 모두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뼈 있는 말이기도 하다.

조직 분위기도 딴판이다. 법원은 판사 한 명 한 명, 재판부 하나 하나가 독립돼 있어 법원에서 최고위층인 법원장이 부탁하거나 지시해도 사실 잘 이행되지 않는다. 또 따르지 않아도 큰 문제도 없다. 반면 검찰은 상명하복의 대표적인 조직답게 상급자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다. 직접 대면할 때 느껴지는 인상과 분위기도 좀 다르다. 검사는 대체로 다소 경직돼 있고 권위적인 모습이 묻어난다면 판사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것 같다. 그러나 그 뒤에 풍기는 권위는 둘 다 감춰지지 않는다.

판사와 검사는 누가 뭐래도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인정받는 직업 중 하나인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고'라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자부심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국민, 시민 위의 판사와 검사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잘난 판'검사보다 '국민'의 자존심을 더 살려주고 더 존중해주는 판사님, 검사님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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