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시험재배지에 심은 그때 그 나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방송국이 경쟁적으로 사극을 방영하고 있으나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즉 스토리가 역사의 기록과 부합하지 아니하고, 의상이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31~1400) 선생이 목화를 들어오기 이전 서민들의 옷감은 주로 삼베나 칡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경남 산청을 찾았다. 당시 원나라에서 수출을 금지했던 목화씨를 몰래 가져와 우리 백성을 따뜻하게 하고 면포를 생산해 조선 초 주요 대일(對日) 수출품으로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한 삼우당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공은 본관이 남평으로 1331년(고려 충혜왕 3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자호 삼우당은 '항상 국가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자신의 도(道)가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12세에 이곡(李穀'목은 이색의 아버지)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1360년(공민왕 9년) 급제했는데 이때 포은 정몽주도 함께 합격했다. 1363년(공민왕 12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그곳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최유(崔濡)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 왔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이성계에게 대패하였다.
이런 격변기에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서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했다. 재배기술을 몰라 한 포기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전국에 퍼지게 했다.
그러나 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옷을 해 입을 수 있었다.
훗날 남명 조식(曺植)은 공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은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라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공은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공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조선조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다가 1400년(조선 정종 2년) 70세로 타계했다.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증직되었고, 1440년(세종 22년)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이,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배향되었다.
또 장인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재배하였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사적 제108호)가 문화재로 지정되고, 여기에 삼우당 선생 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공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가 있다.
공이 태어난 단성면 사월리 생가에는 2007년에 건립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 유지'를 알리는 비를 세웠고, 공이 심은 은행나무에 대해 괴천(槐泉) 유문용(柳汶龍'1753~1821)이 1805년(순조 5년)에 쓴 행단기(杏壇記)가 있다.
나일론 등 신소재가 개발되면서 목화는 거의 재배하지 않아 식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되었으나 아직도 속옷만은 면만큼 대중화된 섬유가 없다고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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