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로 국도에 자리 내주고…경남북 잇던 꼬불꼬불 고갯길은 잊힌 길로
김천에서 3호선 국도를 따라 가면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경남 거창군 웅양면이 도(道) 경계를 이룬다. 지금은 잘 포장된 길로 편안히 넘나들지만 30년 전만해도 경북'경남을 연결하는 통로는 지금의 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4~5㎞ 떨어진 좁고 구불구불한 우두령 길이었다. 그 길로 뽀얀 흙먼지를 뚫고 서울을 오가는 고속버스도 다녔다. 잘 포장된 새 길이 나면서 우두령 길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제 모습을 잃어 이젠 소로로 변했다. 지금은 주로 인근 주민들이 고랭지 채소 등을 실어 나르는 농로로 이용된다. 길도 인간사처럼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길의 부침(浮沈)에 따라 주변 마을도 모습이 달라진다.
◆뜨는 길과 잊혀져 가는 길
김천시 대덕면사무소를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들면 국도 3호선과 지방도 1099호가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면 배터재가 나온다. 산으로 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면 우두령이다. 1980년대 거창의 유력 정치인이 국도 3호선을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배터재 쪽으로 길을 돌렸다. 새 길을 넓혀 포장하고 3호선 이름마저 가져갔다. 높은 고갯길에 꼬불꼬불한 길 대신 번듯한 4차선 국도를 만든 탓이다. 이 때부터 배터재 길은 떴고, 우두령 길은 잊힌 길이 됐다.
추석을 지나 우두령'배터재가 자리한 김천시 대덕면 대리를 찾았다. 마을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경계를 이루는 김천의 최남단 마을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다. 1914년 예서, 대동, 새목골, 덕석마 등 일대 마을을 통합해 대리라 불렀는데 1949년 대덕면에 편입되었다. 1960년 골담과 예서동이 대1리, 안마가 대2리로 갈라진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창 웅양면으로 연결되는 배터재 아래에 자리 잡은 골담마을의 유래가 재밌다. 새로 국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구불구불한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굽을 '곡'(曲)에 마을 '촌'(村)자를 써 '曲村'(곡촌)으로 적고 골담이라 불렀다. 국도가 마을 옆으로 개설된 뒤 도로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외촌'(外村)이라고도 했다.
골담 위 배터재 고갯마루의 경계지점에는 예서동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서(餘瑞)동으로 불렸고, 지금은 예서동, 예서목으로 불린다. 또 문의리 기림마와 사이에 성터가 있어 '예성'(禮城)으로도 불린다.
우두령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 먹고 도계를 넘어 경남 땅에 가서 논밭 일을 하고 점심은 또 도계를 넘어 경북 땅에 와서 먹는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다정한 이웃이다.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우두령
옛 국도를 따라 우두령 오르는데 얼마 가지 못해 길이 막혀 있다. 태풍 '산바' 때 내린 폭우로 산사태가 났다. 아직 응급복구조차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둬 길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찾는 이들이 적어 복구조차 뒷전으로 밀리는 모양이다. 빠른 치유의 손길이 닿아야겠다. 한참 길을 돌아 우두령에 오르니. 경남 거창 쪽 도로는 포장이 잘 돼 있어 쉽게 우두령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경남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우두령은 지형이 소머리를 닮아 우두령(牛頭嶺)이라 한다. 소머리재로도 불린다.
우두령 정상 아래에 잘 생긴 큰 바위가 있어 '덕석'(德石) 또는 '덕석마'로 불린 마을이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마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마을은 민족상잔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선 후방의 빨치산들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국군이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빨치산들이 이곳 우두령 마을에도 손을 뻗쳤다. 국군 빨치산 토벌대가 거창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공비와 내통했다고 무차별 학살했는데 같은 날 거창과 이웃한 이곳 덕석마 마을에도 공비 토벌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지금은 겨우 불탄 집터 등이 남아 마을 흔적만 짐작케 할 뿐이다.
골담과 덕석마 사이의 원터 들에는 옛날 역마(驛馬)가 다니던 시절에 소지원(所旨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어 험한 우두령을 넘나드는 길손들의 쉼터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드넓은 골짜기에 고랭지 채소가 빼곡이 자라고 있다.
이곳 우두령은 경남'북과 전라도를 이어주는 군사'교통의 요충지다 .이 때문에 민란이나 전쟁이 나면 우두령을 차지하기 위한 크고 작은 싸움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우두령을 넘으려 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당시 의병장 김면과 진주목사 김시민이 함께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산에 매복해 있다가 이곳에 들어온 왜병 1천500명을 급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사냥꾼과 심마니 등도 대거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 18세기 초 이인좌의 난 때에는 역도들과 관군이 우두령 확보를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역도들이 김천역에 있는 역마를 끌고 가는 것을 한명구라는 역리가 꾀를 내 다시 찾아왔다는 무용담도 전한다.
◆김천을 흐르는 감천의 발원지도 있어
또 우두령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甘川) 67㎞가 발원하는 봉화산이 있다. 봉화산은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의 경계를 이루는 옛 봉수대가 있던 해발 901m의 평범한 산이다. 발원샘은 속칭 '너드렁 상탕'으로 불리는데 가뭄이 심해도 샘물이 마른 적이 없으며 그 수량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김천시가 시 승격 50주년(1999년)을 맞아 문화원을 중심으로 '감천발원지조사위'를 발족해 3개월 동안 답사를 벌여'너드렁 상탕'을 발원지로 선정했다. 현재 대덕면에서 발원지 관리 및 매년 발원제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우두령 길도 이젠 달라질 모양이다. 2014년까지 2차로로 확장'포장될 예정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펜션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도회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뒤처짐이 오히려 매력 있는 땅으로 각광받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발원지 인근에서 염소를 키우며 40년째 우두령을 지키고 있는 문영학(85) 옹의 정겨운 말은 이곳 인심을 말해주는 듯하다. "아무리 철조망을 잘 쳐놔도 이놈들이 도망을 가거던. 우두령을 넘어 갔다가도 우예 새끼를 놔서 다시 돌아오는 놈도 있고. 짐승이고 사람이고 우두령에 사는 사람들은 경남'경북이 따로 없어."
김천'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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