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서울TK 친구들

입력 2012-10-02 11:02:22

추석은 역시 달콤했다. 대개의 직장인들에 비해 짧은 연휴였지만 명절은 좋았고 고향은 반가웠으며 여전히 넉넉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연세에 비해 무탈하셨고 친지 어른들도 몇 분이 지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들 건강하셨다.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과 그 음식에 깃들인 정성은 여전했고, 추억과 향수를 간직한 물건들과 장소도 그대로였다.

특히 추석 전날, 오랜만에 가진 친구들과의 저녁은 여유롭고 즐거웠다. 수 십 년 전 함께 뛰놀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함께 하는 식사는 신분과 격식, 재력의 빗장을 허물었다. '김 부장, 이 사장, 박 사무관님'이란 호칭 대신 '똥파래이', '곰배', '물돼지' 등 학창시절 별명들이 오고가는 사이 시계바늘이 몇 십 년 전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항상 그랬듯 모이면 먹고, 먹고 나면 세상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대선을 불과 석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라 정치 관심이 유난했다. 기자인 필자가 뭘 좀 안다고 생각했는지 질문이 많이 몰렸다. 선거나 정치이야기가 워낙 민감한 면이 있어 선뜻 나서지 않자 답답했는지 '니는 그것도 모르나' 며 핀잔이 돌아온다. '누가 대통령이 될까', '안철수는 완주를 할까'에서부터 각 후보들의 사생활 문제 등 '카더라' 통신까지 등장한 다양한 화제가 올랐고 여러 주장들이 나왔다. 술잔이 몇 번 돌고나니 대화와 토론의 강도가 격렬해졌다. 특히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의 관심이 유난했다. 서울의 한 공사에 간부로 근무하는 녀석은 "이번에 TK가 정권을 잃게 되면 승진은 물론,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친이'친박하는 것은 사치다. 박근혜가 떨어지면 무조건 대구경북 사람들이 죽는다" 며 금융권에 다니는 친구도 맞장구를 친다. "총선과 달리 대선은 총성없는 전쟁인기라. 겉으로는 복지문제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한 정책 대결이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알고보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싸움이다. 대선 후 정치'경제 등 어느 분야에서건 정권을 차지한 쪽 사람들이 다 차지하제" 라며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녀석이 결론을 내버린다. 동문회 등이 열리면 가끔 고향에 내려와서 술도 사고 밥값도 계산하는 녀석들이라 '잘리면 어떡하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이도 잠시, 문득 똑같은 장소, 똑같은 친구들이 모였던 지난해 추석 풍경이 오버랩됐다. 당시에는 주된 화제가 동남권신공항 무산이었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 몇몇이 '밀양에 신공항이 들어설 것이라고 생각해 아파트나 땅을 사놨다가 재미(?)를 못 봤다'는 푸념이 발단이었다. "신공항이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고향을 지키던 친구들의 주장과 달리 서울 친구들의 대체적인 주장은 이러했다. "밀양신공항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지역이기주의다. 좀 더 크게 대의적으로 봐야 한다", "신공항이 되면 땅값은 좀 더 오르겠지만 국가 재정도 생각해야한다", "우리나라에 지방 공항들의 실태를 잘 알지 않느냐. 이래 좁은 나라에서 국제공항이 하나면 됐지 많을 필요가 있나" 며 신공항 백지화 후 중앙언론에 나온 논조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서울물'을 먹고 있는 친구들의 국가를 생각하는 대범한 생각이 대견했던 기억이 난다.

정치권에만 토종TK, 서울TK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우월하고 지방은 뒤떨어진 곳, 그래서 지방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한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난제다. 넉넉하고 편안하게 보내야 할 명절이지만 되돌아볼 것도 많은 추석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올해는 귀향길에 고향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최창희 특집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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