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유주용의 부모

입력 2012-09-29 08:00:00

스물아홉의 이른 새벽 어느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던 싯다르타 왕자는 아무도 몰래 카필라 성을 빠져나왔다. 출가를 만류했던 아버지와 자신을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마야 부인을 대신해 자신을 기른 이모 마하파자파티,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 그리고 아들 라훌라를 두고 떠나는 길이었다. 6년이었다. 뼈를 깎는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는 데 걸린 인간의 시간이었다.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붓다의 시간이었다. 왕자 싯다르타를 떠나 고향에 붓다로 돌아오는 시간은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카필라 성 밖 쿠단에서 탁발을 하며 수행을 하고 있었다. 작년 봄, 쿠단은 이른 아침부터 비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이모와 아내가 성을 나와 부처를 만나러 간 쿠단은 낡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와 이모는 금단가사를 지어 부처께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아내는 아들을 출가시키는 것으로 재회를 마무리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공부를 했다는 라훌라의 탑 위에는 세월의 무게처럼 망고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어리석은 중생의 미련한 의문이었을까? 불현듯 부처가 아닌 아버지의, 어머니의, 그리고 아내와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탁발로 수행을 이어가는 아들의 모습은 과연 아버지에게 아들의 깨달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리고 29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키워온 자식을 위해 금단가사를 지어 올리며 왕비가 된 이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한 어느 날 홀연히 자신과 아들을 두고 떠난 남편을 아내는 아무런 원망 없이 받아들였을까? 이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으로 새로운 인연을 맺어야 했던 아들은?

문득 세상과 날을 세웠던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긴 기다림을 떠올렸다. 금단가사는 아닐지라도 어머니는 늘 아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못난 아들은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고 이렇게 무디어지고 말았다. 낯선 이방인의 생각이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낡은 옷을 입은 맨발의 소녀가 들꽃을 꺾어 들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유주용의 부모) 소월의 시에 서영은(코미디언 서영춘의 형)이 곡을 붙여 만든 이 노래를 듣노라면 그날 쿠단의 기억이 떠오른다.

소월에게 아버지는 얼마나 아픈 기억이었을까?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이 된 것은 소월의 나이, 두 살 남짓 했을 때였다. 소월 자신이 가난에 시달려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어쩌면 아버지의 기억은 오직 깊은 연민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부모라는 시를 쓴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소월의 시들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시를 유주용이 노래로 부른 것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독일계 다문화가정 출신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가정 출신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당대의 여가수 윤복희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가수로서의 좌절을 아마 그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으로 보았을지 모른다. 또한 그것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마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부모라는 노래에는 시인의 삶과 가수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미욱한 중생들에게 세속의 인연은 모질다.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삶에 대한 화두는 아니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른 아침,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린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이 가을은 많은 이들에게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 그리움의 끝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부모와 형제가 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 시간, 그 어떤 모습도 부모에게는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된다. 붓다께서도 자신을 따라 출가한 이모께서 열반에 들자 몸소 장례를 치르며 말씀하셨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젖을 먹이고 안아주고 길러준 은혜는 너무나 크다. 그 은혜는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만삭의 달이 차는 이유이지 않을까?

전태흥 ㈜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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