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에 대한 민중의 분노 '왜왕 혼낸 대사 신통술' 설화로
일본에서 영웅적인 사명의 발자취를 더듬고 황악산으로 돌아와 직지사를 다시 찾았다. 직지사 경내에 들어서자 더위도 한풀 꺾이고 경내 수목들이 가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사명각 앞에 아름답게 조성된 단풍길 나무들도 어느 듯 색깔을 입기 시작했다. 사명각 앞 샛도랑의 물소리가 시원하기 보다는 시리다는 느낌을 준다.
사명각에 들어 대사의 영정 앞에서 향을 사르고 참배를 한다. 영정에는 사명이 의자에 앉았고 두 명의 시좌승이 곁을 지키고 있다. 왼쪽 시좌승은 쇠로 된 선장(禪杖)을, 오른쪽 스님은 보검을 들었다. 사명 영정에 보검이 그려져 있는 것을 여지껏 모르고 지나쳤다. 사명이 승병대장이었음을 의미있게 표현했다. 새삼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스님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데 사명의 영정은 수염이 위엄있게 그려져 있다. 사명은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경서를 읽고 출가해서 승려의 삶을 살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스스로 '머리를 깎았으나 수염을 길러 승속(僧俗)을 넘나들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승(僧)'속(俗) 양쪽 모두의 짐을 질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 삶이 영정에 투영돼 있다.
◆도술로 왜왕을 혼내 준 무용담이 설화로
사명각을 나와 전각 옆면에 그려진 벽화를 올려다 본다. 병풍이 세워진 곳에 왜병 모습을 한 무리들이 사명을 태운 인력거를 끌고 있다. 또 장작불이 훨훨 타는 방안에 앉아 있는 사명 수염에 고드름이 달려 있고 추운 듯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어릴 때 동화책이나 위인전 등에 실려 있던 내용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명당은 스승 서산대사와 도술시합을 한 설화 등이 여러 편 전한다. 그러나 백미는 사명이 일본에서의 기행에 관한 것들이다. 왜왕(실제로는 막부의 쇼군)과 그의 신하들은 사명을 여러 차례 시험하고 높은 법력에 무릎을 꿇고 조공까지 약속한다는 내용은 압권이다.
사명이 왜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1만8천 구의 글을 쓴 병풍을 세워 놓고 왜왕이 이를 물으니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외워 왜인들을 놀라게 했다. 장작불로 달군 방에서 견디고 연못에서 구리 방석을 타고 다녔다. 뜨겁게 달군 무쇠 말을 타게 하자 사해용왕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하고 왜국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비를 그치게 해달라며 애걸하는 왜왕에게 부자지국(父子之國)의 항복 문서와 인피 조공을 약속받고 비를 그치게 했다는 것 등이다. '임진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무용담과 설화들은 일본에서 사명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사명 일행이 적지 일본에서 적대시하거나 멸시 당한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회담을 앞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8만 병력을 이끌고 교토에 입성하면서 사명 일행을 후시미죠(伏見城)로 불러 이를 참관케 하여 은연 중에 위력을 과시하려고 한 적은 있지만 사명의 인품과 학식에 일본 승려나 관리들이 오히려 승복하고 감명을 받았다. 사명이 가는 곳마다 일본 지식인들이 찾아와 사명에게 너도나도 시'문을 청했다. 이 때 남긴 시'문이 남아 있어 오늘 날 사명의 일본 발자취를 그나마 더듬을 수 있게 한다. 더구나 도쿠가와의 아들조차 사명에게 법어(法語)를 거듭 청했는데 이 때의 선시(禪詩)가 지금도 전한다.
'사명당 평전(한길사'2009)'의 저자 조영록은"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원흉이지만 조선은 스스로 복수할 힘조차 없었다. 마침 사명이 탐적사(探敵使)로 적국에 건너가자 사명을 생불로 혹은 신인(神人)으로 내세워 왜왕을 항복시켜 민족이 당한 억울한 과거를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 한 것"이라고 했다. 비록 도술을 부리는 등 허무맹랑한 얘기지만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았던 일본의 침략으로 7년 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조선인으로서 무도막심한 일본에 대해 원수를 갚는 일은 민중의 염원이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상상이나 소설 속에 신화적인 인물로 사명을 등장시켜 민족적 울분과 염원을 해결토록 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했다. 특히 항복한 왜왕에게 인피 조공을 요구한 것은 전리품으로 왜병이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를 베어간 것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해 더욱 가공할 만한 내용을 지어낸 것이란 생각이다.
◆한'일 양국의 평화를 이끈 사명의 외교력
사명대사는 고국으로 돌아와 비변사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한다. 임금 선조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금란가사 한 벌 등도 하사한다. 이 유품은 현재 밀양 표충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명은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도 어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쓰시마로 가는 바람에 문상을 하지 못했다. 사명은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 뒤늦은 조문을 하고 이듬해 1월 서선대사의 대상(大祥)까지 치른다. 65세가 되던 해인 1608년에는 선조가 승하한다. 사명에게도 병마가 침입해 그를 괴롭힌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내려와 초막을 짓고 수행 생활에 들었다. 1610년 8월 26일 67세의 나이로 입적한다. 법랍 54세였다. 지금부터 402년 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 도요토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조선과 화친을 요구했다. 이에 답하는 형태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후 6년 만에 사명을 파견한다.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과 교섭을 하는 것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큰 정치문제가 되기 때문에 사명은 국서도 갖지 않고 관직도 없이 비공식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다. 앞에서 사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성공적인 회담 결과로 억울하게 끌려온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사명이 일본을 간 것은 비공식적인 사행(私行)의 성격을 띤 것으로 정식으로 양국의 국교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사명의 활약에 힘입어 조선은 우월적 입장에서 국교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사명은 탁월한 외교력으로 일본과의 국교 회복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한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그 후 한'일 간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재평가 받는 이유이다.
사명 귀국 후 조선 조정은 일본에게 사죄의 뜻을 담은 국서를 보낼 것을 요구하는 강화조건을 마련해 대마 도주를 통해 일본 막부로 보낸다. 일본이 조선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1607년(선조 40년)에 여우길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한다. 처음 사절단 명칭은 통신사가 아닌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이는 사명이 도일하여 국교 교섭과 포로 송환에 이어 정식으로 다시 도쿠가와의 서신이 온 데 대한 회답과 함께 추가 포로 송환이 사절단의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여우길 일행은 귀국 길에 조선인 포로 1천418명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10년 뒤인 2차 통신사 (1617년) 파견에서는 321명밖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억울하게 끌려 간 모든 조선인 포로 송환이 사명의 염원이었으나 이미 가정을 꾸리는 등 여러 가지 인연들이 얽혀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로들도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또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의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등이 겹쳐 포로 송환 문제는 점차 시들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조선의 도공'선비 등이 일본 에도문화를 꽃피우는 토양이 된다. 일본의 도자기를 전 세계에 알린 심수관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일 관계 개선에 사명정신 교훈 삼아야
사명각을 나오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짧은 일정으로 사명대사의 일본 발자취를 찾아봤다. 사명의 높은 학문적 식견이나 나라 사랑의 실천을 제대로 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자책감도 있다. 이럴 때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하는 가 보다.
지금 한'일관계는 미묘하다. 역사왜곡, 위안부, 독도문제 등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남긴 부(負)의 유산이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전후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포로를 송환하고 일본의 사과를 받은 사명은 임진왜란의 전후 처리를 확실히 한 외교관이었다. 그의 활약이 조선통신사의 길을 열었고 그 후 양국간의 평화를 만들었다. 국가의 큰 전란을 맞아 승려가 나아갈 길을 고민했던 사명당은 군사를 이끄는 장수로서, 전후에는 외교관으로서 호국불교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그는 당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의 일본에서의 활약은 사명대사(使命大使)라 할 만했다. 한'일 관계가 꼬이고, 일본이 침략에 대한 반성을 외면할수록 사명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들의 '못남'때문일 것이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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