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린 돈 무려 28조 '5만원권' 구경하긴 왜 힘들까

입력 2012-09-15 08:00:00

한은 회수율 40%, 타 권은 100%…유통 잘 안돼 검은돈 의혹 사기도

기존 1만원권과 5만원권의 부피를 비교한 사진.
기존 1만원권과 5만원권의 부피를 비교한 사진.

2009년 6월 5만원권 지폐가 첫 발행됐다. 이후 3년이 지났다. 5만원권은 과연 우리 생활 속에 잘 정착했을까?

살펴봤더니 5만원권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돈', '갖고 있지만 쓰지 않는 돈', 그리고 '가지고 싶어 몰래 숨기거나 위'변조 등 범죄도 서슴지 않는 돈'으로 나타났다. 물론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측면도 많지만 아직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5만원권 다 어디갔어?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으로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은 모두 28조1천800억원 정도다. 첫 발행 당시 2조4천억원이었던 것이 3년 만에 10배 넘게 증가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5만원권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수율'이 그 지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만원권의 회수율은 40% 정도다. 5만원권 10장 중 6장은 시중에서 돌지 않고 어딘가에 잠자고 있다는 것. 금액으로는 17조5천억원(3억5천만 장) 정도다. 1만원권, 5천원권, 1천원권은 모두 회수율이 100%에 가까운 것과 대조적이다.

실제로 기자가 무작위로 직장인'학생'주부 등 10명을 만나 지갑에 5만원권이 있는지 확인해봤더니 소지자는 단 2명이었다. 나머지 8명은 일상 속에서 5만원권을 쓸 일이 별로 없다고 입을 모았다.

직장인 장모(34) 씨는 "결혼식이나 문상을 가서 경조사비를 낼 때에만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5만원권을 인출해 쓴다. 요즘 경조사 부조 금액이 5만원인 경우가 많은데, 가급적이면 봉투에 1만원권 5장보다는 보기도 좋고 깔끔하게 5만원권 1장을 넣는다"고 말했다.

쓰려고 해도 아직까지 시중에서 5만원권 사용이 불편한 것도 이유로 나타났다. 거스름돈 문제가 대표적이다. 영세 상인들은 고액의 거스름돈을 내줘야 해 부담스럽다. 소비자들도 거스름돈을 받는 과정이 걸리적거리는 등 '과부하'가 걸려 불편해진다. 떡집을 운영하는 박모(41) 씨는 "나같은 영세 상인들은 5만원권으로 지불하는 손님이 여러 명 오면 수시로 인근 은행에 가서 돈을 바꿔와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5만원권이 눈에 잘 띄는 시즌이 있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다. 주로 중'장년층이 은행에서 인출한 빳빳한 5만원권을 가득 쥐고 있다. 부모님이나 10, 20대 자녀 세대에게 용돈으로 건네진다. 하지만 5만원권 유통 활성화와는 거리가 멀다. 다시 은행으로 입금되기 때문이다.

박모(16) 군은 "명절에 5만원권으로 용돈을 받는 경우가 늘었다. 하지만 학생인 내가 들고 다니며 쓸 일은 별로 없다. 큰 액수를 지불해야 할 경우에는 통장에서 돈이 바로 빠져나가는 체크카드를 쓴다. 용돈이 궁한 학생들은 자칫 5만원권을 잃어버리면 타격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발행한 지 3년이 지났지만 5만원권이 사용 가능한 은행 현금인출기를 찾기도 쉽지 않다. 대구 동성로에서 여러 은행 지점과 편의점에 있는 현금인출기를 살펴봤더니 11대 중 8대에 '5만원권 입'출금 불가' 문구가 붙어 있었다.

모 은행 관계자는 "기기 업그레이드 비용과 실제 이용 빈도 등을 고려해 한 곳에 설치돼 있는 현금인출기 중 1대만 기기 업그레이드를 했다. 나머지는 기기 노후 등 다른 사유가 더해질 경우 교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융업계에 따르면 5만원권 인식이 가능한 현금인출기를 새로 설치할 경우 대당 3천300만원, 기기 업그레이드를 할 경우 대당 66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5만원권 발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만원권 발행 잔액은 25조9천600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36% 늘었다. 전체 화폐 발행 잔액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체 화폐발행 물량은 급감하고 있다. 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은행권 발행 수량은 2008년 17억1천만 장에서 지난해 4억1천만 장으로 4년 만에 4분의 1로 줄었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5만원권을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적정 수준의 통화량을 맞추기 위해 1만원권과 수표 발행은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5만원권이 아직 화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화폐는 물건을 살 때 필요한 지불 수단'회계 단위로 가치를 재는 수단'자산으로 저장하는 수단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 중 지불 수단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검은 돈'의 대명사로

기존 1만원권의 5배나 되는 액면가를 지닌 5만원권은 '검은 돈'으로 둔갑해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경로로 유통되고 있다. 사과상자 속 가득한 1만원권은 옛날 얘기가 됐다. 5만원권을 사용하면 사과상자보다 들고다니기 쉬운 007가방에 더 많은 금액을 넣을 수 있게 된 것.

지난해 4월 전라북도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110억원대의 돈뭉치가 발견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모두 5만원권이었다. 수배 중인 친척으로부터 열 두 차례에 걸쳐 불법 도박 수익금을 받아 마늘밭에 숨겨뒀던 L씨 부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올해 1월 모 기업 회장 L씨는 폭력배에게 청부폭행의 대가로 3억원을 건넸다.이때 5만원권 6천 장을 착수금과 성공 보수로 나눠 두 차례에 거쳐 전달했다.

이 밖에도 2010년 6'2지방선거 당시 공천이나 선거운동 비리 등에서도 5만원권이 검은 돈으로 발견됐다. 모두 2009년 5만원권 발행 이후의 일이다. 경제 수준과 화폐발행 비용절감 등의 이유로 5만원권이 발행됐지만 함께 뇌물'탈세'돈세탁 등의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실제로 현실로 나타난 것.

2000년 캐나다 중앙은행은 고액권을 이용한 자금 세탁과 각종 조직적인 범죄를 예방한다며 당시 최고액권이었던 1천달러 지폐의 발행을 중지하고 회수에 나선 바 있다. 한국은행은 신권을 발행하며 구권을 거둬들인 경우는 있지만 사회적 문제를 이유로 화폐 회수 조치를 내린 적은 없다.

◆불경기엔 위조도 성행

5만원권이 고액권인 만큼 위조가 성행할 것이라는 우려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5만원권 위조 지폐 발견 장수는 모두 220장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7장(566%)이나 늘었다. 5만원권이 첫 발행된 2009년 이후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이다.

범죄가 늘어난 이유는 경기불황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다른 화폐 위'변조 사건도 함께 늘어난 것. 한국은행과 경찰청에 따르면 2007년 3천614건이었던 화폐 위'변조 사건 발생 건수는 지난해 7천899건으로 갑절로 늘었다. 위폐 방지 기술과 감별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만큼 위폐 제조 기술이 발달한 것도 한 원인이다. 따라서 경찰은 발견되지 않은 위폐도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위조 지폐는 적발도 어렵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통화 위'변조 범죄의 검거율은 4.19%였다. 폭력범죄(95.7%), 절도범죄(69.7%)에 크게 못 미친다. 신고율 역시 1%가 안 된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위조 화폐 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올해부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위폐의 특징과 위조지폐범의 수법, 일련번호 등 정보를 관리시스템에 담아 경찰청'금융기관'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과 공유한다는 것. 시스템 개발은 올해 안에 완료될 예정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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