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의 에세이 산책] 석별의 슬픔 읊조리다

입력 2012-09-12 07:22:03

추분 무렵이다. 생명활동을 멈춘 잎사귀들이 자신을 있게 한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디론가 갈 길을 재촉한다. 풍요한 결실의 넉넉함 뒤에 조락으로 인한 결별의 아픔이 내재되어 있는 시절, 그리고 겨울의 길고 긴 침묵을 예비하는 것이다.

생명을 피어나게 하는 봄에의 기다림, 이 설레는 소망이 없다면 마른 갈대같은 겨울 한 철이 얼마나 더 쓸쓸하랴? 뭇 생명들이 살을 에는 추위 앞에 납작 엎드려 숨소리를 죽이고 있는 시절에도 삶에의 의욕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음은 머지 않을 소생에의 기대 때문이 아닐까?

생명을 위한 준비, 그것은 세상 무엇보다 값지다. 그러기에 나목(裸木)은 고목(枯木)과는 벌써 격이 다르다. 고목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퇴역장병 같은 나무라면 나목은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뛸 준비가 되어 있는 예비군 같은 나무다. 우리네 일상사의 만남과 헤어짐도 고스란히 이 나무들의 모습을 닮았다. 새로운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 이별이 나목의 모습이라면 고목은 이미 영원한 결별을 고해버린 그런 나무라 하겠다.

사람은 누구든 만남을 반기고 이별을 아쉬워한다. 이별은 애석함이기 때문이다. 애석함이란 얼마나 그 여운이 진한 정서인가? 그러기에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만남보다는 헤어짐을 더욱 아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남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처음 만남은 대개 농도 짙은 반가움으로 시작된다. 어깨를 부딪고 뺨을 어루만지면서 서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표시한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랜 헤어짐 뒤의 해후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식지 않는 반가움이란 애당초 기대하지 말 일이다. 애석하게도 첫 순간의 불꽃이 튀는 듯 격한 반가움은 그리 오래 있어 주질 않는다. 그것은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며 꿈결처럼 멀어져 간다. 붙들 수 없는 세월의 수레를 타고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헤어짐의 욕구가 슬슬 고개를 내민다.

사람이란 끊임없이 변하고 바뀜을 추구하는 동물인 까닭이다. 아쉽다고 여겨질 때 헤어지는 것이 만남의 끝을 보고 마는 것보다 한층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끝장을 보고 마는 만남, 절정에 다다른 폭발적인 즐거움의 발산 후에 남는 것은 화려한 축제의 뒷마당 같은 쓸쓸함과 허무 뿐이다.

인간 존재의 보편적 정서란 것이 본시 그런 성 싶다. 만남의 기쁨은 오래 머리에 남지만 이별의 슬픔은 더 오래 가슴에 남는 법이다. 그러기에 자고로 만남의 기쁨을 노래한 글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읊조린 글이 보다 진한 떨림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석별이 지니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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