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남자들의 이야기-남자의 물건

입력 2012-09-11 10:54:32

김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을 접한 때는 몹시 거셌던 한파가 지나고 얼어붙은 땅에 새로운 물길이 열리고 연둣빛 싹들이 다소곳이 솟아나는 어느 봄날이었다. 설렘이 없다면 살아있는 게 아니며 '설레라고 계절이 바뀐다'는 책 속의 글귀가 무색하게, 봄이라는 새로운 한 해의 본격적인 시작은 참 무겁고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를 살고 있으며, 이제 곧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을 바라보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쉽지 않은 삶의 무게와 존재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과연 사십대의 시간들을 불혹(不惑)의 자세로 살고 있는지, 또 지천명(知天命)을 맞이할 지혜와 용기는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한 불안이 봄을 시작하는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즈음 접하게 된 이 책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불안한 한국 남자들의 문제이며, 이 불안함은 존재의 확인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안한 존재로 인한 심리적 불안은 적(敵)의 존재를 명확하게 하거나 이야기를 통한 내 존재의 확인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언어를 다스리는 장군인 이어령에게 사열대와 같다는 '책상', 아내와 세 아들 모두와 함께했던 독일에서의 매일 아침식사를 가장 든든한 추억으로 간직한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과묵한 성격으로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는 '안성기의 스케치북' 등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을 대표하는 중년 남자들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다.

내게 그런 물건은 조금은 생뚱맞게도 커피와 관련된 도구나 소재가 아니라 연필이다. 내 또래 모두 그랬듯이 옷이나 가방 등을 대물림으로 받던 그 시절,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어머니께서 단정히 깎아 필통에 넣어주셨던 연필은 막내였던 내가 가지는 오로지 나만의 새 물건이었다. 가방에 잘 깎여진 연필 두어 자루가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공들여 연필을 깎아서 필통에 넣어 다니며 친구들이 모두 볼펜으로 필기를 하는 동안에도 오랫동안 연필 필기를 고집했다.

이젠 태블릿PC와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깎아 써야 하는 불편함을 가진 연필은 고사하고 볼펜조차 잡을 일이 드물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시간에 내가 찾는 것은 연필과 오래된 노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한 글자 적어 내려감 없이 시간을 보내버릴 때도 많지만 연필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연필을 쥐고 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연필을 깎는 순간에 느껴지는 정갈함 또한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커피 생두 구매를 위해 해외 출장이 잦아도 변변한 기념품 하나 사지 못하는 촉박한 일정이 대부분이라 자주 그러하진 못하지만, 혹여라도 짬이 나면 공항 내 기념품 상점에서 연필을 골라오는 호사를 누릴 때면 긴 일정의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그렇게 모아온 각국의 여러 연필이 있어 마음 나눌 곳 없이 생각이 복잡한 날에는 그들 중 하나를 골라 마음을 모으고 천천히 깎기 시작한다. 둥글거나 네모나거나 육각인 연필의 모양새와 다양한 나무의 질에 따라 각각의 느낌이 다르며, 나무가 깎여나가며 흐르는 향이 마음을 즐겁게 한다.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 마음에 드는 커피 원두를 고르고 천천히 분쇄하며 마른 향을 느낄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흰 종이 위에 글씨를 쓸 때 나는 사각거림 또한 나를 기운 나게 한다. 커피를 내리는 순간 흐르는 또르르 물소리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흔하고 값싼 물건이지만 내겐 참 귀하고 소중한 물건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불혹이나 지천명의 순간까지는 못 되더라도, 가장 혹은 사회인이라는 역할에만 강요되어 잊고 지내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이 문득 찾아오면 내게 의지가 될 나만의 물건을 한두 개 정도 찾아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람이 시원해지는 가을 초입에 한 잔의 커피를 두고 그 물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을 한국의 모든 중년 남자들이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안명규/커피명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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