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돌려줄 것이 이것뿐이겠는가

입력 2012-09-10 07:39:43

지체 높은 집안과 결혼 이야기를 앞두고 마음이 한껏 부풀었을 때,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다.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을 묶어버려, 신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이야기는 신화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두가 놓아주기 싫었지만 아버지는 떠나셨다.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 계획에는 없던 일이다. 신은 질주하려는 나의 다리를 걸었다.

남편이 너무 가부장적이고 자기 자신밖에 몰라, 늙으면 보자고 평생을 벼르며 살아왔다. 정년을 앞두고 '이제부터다' 했는데 내가 괄시(恝視)할 틈을 주지 않고 하늘은 남편을 불러갔다. 마음을 비웠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두 번째의 개입이었다.

평생을 꾀부리지 않고 살아왔다. 겨우겨우 말년 준비를 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더 긴장하면서 살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이 터져 모아놓은 재산들이 뭉텅 잘려나갔다. 인생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또 한 번의 경고였다.

인간의 열망과 그것에 무심한 세상. 둘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가 문제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으려는 것과 우리에게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는 세상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태어났는데, 그놈의 집착과 욕심은 세포 구석구석까지 어느새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그 집착 품에 두 손이 떨리도록 기뻐하는 이중성에 스스로 놀란다. 점령자에게 힘겹게 눌리면서도 그 짐을 선뜻 풀지 못함을 스스로 탓한다.

인생에 대한 나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왔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져버린 씨름판처럼, 그저 빈손으로 털고 나오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살아가면서 돌출될 수 있는 행'불행의 현상을 이제는 보다 근접한 거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시력으로 성장했다. 생명마저도 소유권을 가진 누구에게서 조차(租借)해와 사용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돌려줄 물건을 오래 가지고 있다 보니, 그것이 진정 누구의 것이었던가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순간순간이 반복이 없는 일회성의 기회이고, 아침이면 다가오는 평범한 일들조차도 그래서 비범하지 않은 일은 없는 것이다. 세상 물결에 휩싸여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은, 값진 선물을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이다. 마감을 해야 할 시간이 닥칠 때 조금만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지 말자. 죽음이 가장 큰 축복임을 받아들이고, 미련없이 돌려주는 것이 부여해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고 윤 자 약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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