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나주인 정몽길과 영천 효정리 느티나무

입력 2012-09-06 14:15:27

깊이 뿌리내려 풍파에 흔들리지 않기를 기원

영천시 화산면 효정리는 나주 정씨 신녕파의 집성촌이다. 조선 개국공신이자 호조참판과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등 3도 관찰사를 지내며 선정을 펼치자 세종이 '나에게 있어서 경은 마치, 약석(藥石'온갖 약재와 치료를 통틀어 일컬음)을 둠과 같구려'라고 했다는 정몽길(丁夢吉)과 아우 정몽상(丁夢祥) 형제가 500여 년 전에 터를 잡아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천(莪川)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형 몽길이 북쪽은 아우 몽상이 개척했다고 한다. 이곳은 또한 효정리라고 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쪽을 효정1리, 북쪽을 효정2리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말로 남쪽은 괴정(槐亭), 북쪽은 효리(孝里)라고도 한다.

괴정이라는 말은 입향조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한다. 느릅나무과의 느티나무나 콩과의 회화나무는 한자로 공히 괴(槐)를 쓰며, 각기 괴와 회로 읽는다. 이는 식물분류가 오늘날과 같이 체계화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괴정은 느티나무 숲이 정자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나무를 정자로 표현하는 사례들은 많다, 즉 달성군 가창의 행정(杏亭)은 큰 은행나무가 정자구실을 하는 데서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효리(孝里)는 선조조 후손 정응기(丁應璣)와 부인 오천 정씨가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살 때 침입한 왜적을 몽둥이와 돌로 대항했으나 물리치지 못하고 응기와 아버지가 왜놈이 휘두른 칼에 숨졌다. 이어 왜적이 어머니(정씨 부인의 시어머니)마저 죽이려고 하는 찰나 정씨 부인이 앞을 가로 막으며 '너희들이 이 노인을 해치면 나도 이 자리에서 죽겠다. 그러나 이 노인을 살려주면 나는 너희들을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에 왜적은 정씨 부인의 청을 들어주고 그녀를 말에 태워 후퇴했다. 그런데 10리쯤 가다 부인 정씨는 은장도로 자신의가슴을 찔러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왜병들은 늙은 부모를 위해 함께 죽은 부부의 갸륵한 효성에 감탄하여 '출천지 효열'(出天之孝烈)이라고 경탄하고 '다시는 이 마을을 침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사라졌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선조(宣祖)가 1606년(선조 39)에 정려각을 세워 그들의 효열을 기리도록 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의 북상로의 한 곳이었던 신녕 일대는 왜란 중 피해가 컸다. 이때 응기의 아우인 아계(莪溪) 정응거(1556~1595)가 창의하여 소계(召溪), 군위 등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박연전투와 의병장 권응수와 함께 영천 복성전투에 참가해 대승을 거두고, 경주성 탈환작전에도 참가해 선무원종 3등공신에 서훈되고, 의금부 도사로 증직되었다. 현재 대구에 소재한 영남충의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효정리에는 현재 효열각 이외 입향조 두 분을 기리는 돈남정(遯南亭), 임란 공신 정응거(丁應居)의 형이자 효자인 응기(應璣), 종형인 응호(應湖), 응방(應芳)의 우애를 기려 후손들이 지은 사위정,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정갑조(丁甲祖)를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활천정(活川亭)과 그 이외 선조들이 살던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전통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입향조가 여러 종류의 나무 중에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골라 심은 뜻은 깊이 뿌리내려 온갖 풍파에도 흔들리지 말고 근본을 잃지 않기를 기원하며, 재질이 단단해 건축용이나 가구재 등 쓰임새가 많은 느티나무처럼 어느 장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회화나무는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학자로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되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훈을 잊지 않은 후손들은 충신, 효자, 열녀, 행의(行義)가 바른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마을 곳곳에 서 있는 큰 노거수가 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많을 때에는 200여 가구였다고 하나 상당수 대처로 나가고 지금은 60여 가구뿐이라고 한다. 6'25전쟁과 산업화를 겪으면서 많은 농촌이 피폐해졌다. 이 마을도 예외일 수 없으나 아직도 정자 3동과 효열각, 고택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감내할 수 없어 점점 퇴락해 가고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체험마을 등으로 활용해 생기가 넘치는 마을로 변신시킬 수는 없을까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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