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성인 우암 이열도와 예천 선몽대 숲

입력 2012-08-23 14:08:44

아름드리 소나무 즐비…'풍수' 고려해 조성

최현득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구향교에서 '맹자'(孟子)를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이 같은 수강생인 전 경북문화재연구원 사무처장 김규탁 씨가 은퇴하여 살고 있는 예천 감천(甘泉)을 방문하는데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가고 오는 길에 선몽대, 회룡포, 삼강주막도 둘러볼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쾌히 승낙했다. 회룡포, 삼강주막, 삼수정은 이미 가본 곳이긴 하나 또 가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고, 김 전 처장은 현직에 있을 때에도 가끔 만났었기에 낙향해서 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향교 앞에서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예천으로 향했다. 첫 방문지는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仙夢臺'명승 제19호)였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초입 내성천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다. 호안, 방풍과 수구막이용으로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라고 했다.

숲을 지나 막다른 지점에 우뚝 서 있는 선몽대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규모가 작았다. 또한 대(臺)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물이 줄어서 그런지 수심도 얕고, 모래밭도 넓지 않았다. 소(沼) 역시 메워져 깊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경관이라는 것이 겉만 화려하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느끼는 사람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만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강산이 수십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당시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서도 안 될 것이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은 물론 임란(壬亂) 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서애 류성룡과 역시 임란 때에 영남 방어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학봉 김성일, 그 외에도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다녀간 곳이니 내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히 근기(近畿) 출신인 다산의 7대조 정호선(丁好善)이 시문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을 따라 다산 정약용(丁若鏞)도 이곳을 다녀가면서 시를 남겼으니 더 뜻 깊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경상도에서 실학자 다산의 흔적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서울에서 생활했고 전남 강진 초당(草堂)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강진으로 이배(移配)되기 전 잠시 포항 장기에 머물렀지만 다산의 아버지가 예천군수를 역임했다는 사실과 다산이 아버지를 따라 선몽대를 찾아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이번 답사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대(臺)를 건립한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는 본관이 진성(眞城)으로 1538년(중종 33)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린도 찰방을 지낸 이굉(李宏)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수량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신중하고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미묘한 말과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종조부인 퇴계가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1576년(선조 9) 과거에 급제, 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박사, 사헌부감찰, 예조정랑을 거쳐 은계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585년(선조 18) 외직인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이어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상도 경산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대신들이 우암을 천거했다.

사비를 들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학교를 세우고, 농업을 장려했다. 세금을 골고루 부과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등 불과 1년여 만에 고을을 안정시켰다. 어느 날, 감사(監司)가 보자는 연락이 왔다. 급히 달려갔더니 기껏 한다는 부탁이 책의 표지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글씨를 잘 써서 특별히 그런 주문을 했을 것이나 공의 생각은 달랐다. 사적(私的)인 일로 바쁜 공직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직위가 높은 감사라도 부당하다며 관복을 벗어 던지고 물러나와 그 길로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은 1563년(명종 18) 선몽대를 짓고, 원림을 조성해 평생 동안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다가 1591년(선조 24) 향년 54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선몽대는 당색과 학파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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