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모든 법률이나 규칙은 믿음이 없어서 생겨난 것이다. 조금 거창하게 들어가자면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데 가만히 두고 보자니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서 규칙을 정하고, 벌칙도 만들게 된 것이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다. 저 혼자 술 마시고 운전하는데 사실 무슨 상관이랴. 물론 개인의 불행이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불행일 수 있기에 이를 막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면허를 뺏고 벌금까지 매기는 것은 음주운전의 폐해가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꿎은 남의 가족 눈에 피눈물 흘리지 않도록 하려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이들을 벌하기 위해서 규칙과 벌칙이 생겨난 것이다. 이야기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조만간 병원 응급실마다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의사들이 속출할 것 같다.
이달 5일부터 바뀐 응급의료법이 시행됐다. 응급실 근무의사가 긴급한 전문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거치지 않고 전문의 진료를 받도록 했다.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된 모든 병원은 야간이나 휴일에 모든 진료과목에 당직의사를 둬야 한다. 전문의만 당직의사가 될 수 있다. 당직전문의는 비상호출을 받으면 무조건 나와야 한다. 전문의를 당직의로 세우지 않거나 당직전문의가 호출을 받고도 진료를 안 하면 병원장에게는 과태료 200만원이 부과되고, 해당 의사에게는 면허정지 처분이 내려진다. 규칙이 생겼고, 지키지 않으면 벌칙을 준다는 말이다.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다. 이달 초 서울에서 열린 설명회는 보건복지부 성토장으로 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무지 지킬 수 없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소병원에는 진료과목별로 전문의가 한두 명뿐이다. 사실 한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규칙대로라면 이 의사는 1년 365일 내내 당직을 서야 한다. '설마 그러려고' 하겠지만 실제 규칙이 그렇다.
일부 병원은 응급실을 폐쇄할 수밖에 없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어떤 의사는 "호출을 받고 몇 분 만에 도착해야 규칙을 지킨 것이냐"고 묻고, 다른 의사는 "전문의가 올 때까지 인턴이나 레지던트는 팔짱만 낀 채 지켜보란 말이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쯤 되면 막 가자냐는 식이다. 의사들 욕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규칙이 하도 어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런 어이없는 규칙이 생겨났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대구 때문이다. 아니 '대구 때문'이라고 한다. 장이 꼬인 네 살짜리 아이가, 뇌출혈로 쓰러진 40대 여성이 병원을 떠돌다 숨졌다. 둘 다 대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들 사건을 조사한 백서에서 두 환자의 직접적인 사인이 응급체계 때문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구구절절 전해봐야 때늦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대구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규칙이 생겼을까. 대구 외에 다른 모든 지역의 병원에서는 환자를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서 휴일이나 한밤중을 마다 않고 의사가 달려왔을까. 답은 너무도 뻔하다.
전문의 10명이 있어도 응급실 한 번 내려와 보지 않고 인턴, 레지던트에게 전화로 지시만 하는 병원이 있는가 하면, 비록 혼자뿐이지만 만사 제쳐 놓고 응급실로 달려가는 의사가 있는 병원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개정된 응급의료법 시행을 이틀 앞두고 3개월의 계도기간을 둔다고 했다. 규칙을 어겨도 벌칙을 주지 않겠단다. 그런데 이게 답이 아니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필요할 때 곧바로 달려가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다. 도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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