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듬뿍 친 '해거름 갈치' 한 토막이면 밥 한 그릇 뚝딱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다. 인간들이 저지른 지구 온난화 탓인가 보다. 더위 그래프가 상승 곡선을 그리더니 36~37℃ 선에서 우물쭈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대로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있지만 그게 먹구름으로 바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그래, 까불어 쌓더니 뜨거운 맛을 한 번 봐야지"라는 투로 더위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고 있다.
더위는 잠맛을 죽이고 밥맛을 죽인다. 이럴 때는 궁여지책으로 묘수 하나를 차용해 오는 수밖에 없다. 나의 묘수는 시골의 오일장터로 달려가 어릴 적 한더위 때 맛있게 먹었던 반찬거리를 사 오면 아쉬운 대로 살맛이 난다. '햇빛 속으로 나가기 싫다'는 아내를 공들여 설득한 후 무엇을 살 것인지를 대충 챙기면서 집을 나선다.
오늘은 3일, 8일 장이 서는 가까운 자인(慈仁)장으로 간다. 굵은 소금을 뿌린 간갈치를 한 묶음쯤 사고, 민물고기를 파는 고무 다라이 아줌마들이 나와 있으면 그것도 한 사발 사야지. 장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더니 벌써 머릿속의 바구니는 가득 차고 말았다.
옛날 어릴 적의 여름 반찬은 된장, 오이무침, 오이냉국, 호박, 가지, 풋고추, 열무 등 아무리 꼽아도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거기에다 조금 더 보태면 감자와 멸치볶음, 들깨순 조림, 된장에 박아 둔 마늘종과 콩잎, 들깻잎을 들 수 있다. 바다와 거리가 먼 내륙 깊숙한 곳이어서 값비싼 해산물은 웬만한 집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간갈치와 간고등어는 시골 반찬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특별 음식이었다. 내가 더위를 물리칠 반찬 중에서 하필 소금을 듬뿍 친 간갈치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 한 토막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갈치나 고등어를 사러 가실 땐 항상 파장에 나가셨다. 그때쯤 가야 하루 종일 팔다 남은 생선들을 헐값에 사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해거름 생선'들은 짤 수밖에 없었다. 쨍쨍 쬐는 햇볕 아래서 상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소금질이 최고였다. 사실이지 그런 간갈치를 먹어 보지 않은 이들은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밥 한 술 입에 떠 넣고 갈치 토막을 약간 크게 베어 물면 너무 짜서 온몸이 떨린다. 몸 떨림의 도수는 영하 몇십 도의 추위와 맞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더위를 내쫓는 최고의 반찬은 간갈치를 능가하는 게 없다.
자인장터 농기구상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서니 인근 동곡장(1일, 6일)에서 낯이 익은 아줌마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민물고기는 물론 펄쩍펄쩍 뛰는 민물새우와 다슬기까지 내 구미에 딱 맞는 것들이 "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내시지" 하고 재촉을 해댄다. 꺽지 새끼들이 주종인 민물고기 한 사발은 1만3천원, 친절하게도 배를 따고 깨끗하게 손질까지 해준다.
민물새우는 살아 있는 놈들이 많아 선도가 좋아 보였다. 다슬기는 전에도 국내산으로 믿고 샀는데 속은 적이 있어서 살까말까 망설이다 샀지만 아니나 다를까 또 속고 말았다. 고무 다라이에도 원산지 표시가 의무화되었으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우리 강에서 잡은 다슬기는 삶으면 맑은 푸른 색깔의 물이 나오고 탱자나무 가시로 빼낸 알갱이들은 쌉싸래한 맛을 내는 게 정말 일품이다. 그 맛은 무엇에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독특한 맛이다.
다슬기국은 부추만 썰어 단순하게 소금간만 하고 맑게 끓이면 상큼한 게 정말 먹을 만하다. 지역마다 애기배추를 넣는 등 끓이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나는 단순한 걸 좋아한다. 또 음식 솜씨가 좋은 대폿집에선 다슬기 삶은 물에 들깻잎과 풋고추, 그리고 마늘을 쑹덩쑹덩 썰어 넣고 깨소금을 뿌린 다슬기탕을 내기도 한다. 그건 술안주로 그만이지만 숟가락 방문 횟수가 잦거나 알갱이를 많이 퍼 가면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이날 자인장 나들이는 절반은 실패지만 절반은 성공이었다. 간갈치는 요즘 입맛에는 너무 짜고 다슬기는 어릴 때 직접 잡았던 그 맛은 아니었다. 승률 50%는 투전판에서는 진 게임이지만 나는 절반의 성공에 더 큰 무게를 두려 한다. 민물새우와 민물고기 조림 맛은 잃어버렸던 입맛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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