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영남 문인화, 석재 서병오의 재탄생을 기대하며

입력 2012-07-24 07:01:56

■이인숙(문학박사·대구대 강사)

# 서병오 필묵으로 표상된 풍류성, 호연지기는 곧 경상도인의 심상

올해는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29일은 그의 생일이다(음력 6월 11일). 서병오는 경상도 특유의 선이 굵고 정 깊은 마음을 필묵으로 표현한 서예와 문인화 작품을 남긴 시서화 삼절(三節)의 예술가이다.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문화인으로서, 여러 권의 책을 출판 편집한 지식인으로서, 풍류인으로서, 지역 산업발전에 기여한 경제인으로서 다양한 위상을 가진 서병오가 근대기 대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탄생 150주년을 빌미로 그를 돌아볼 때 사군자화를 남긴 문인화가로서의 성취가 우선적으로 주목된다. 1920, 30년대 동서가 부딪치고 신구가 교체되던 격변기에 서병오는 '수묵사의(水墨寫意) 사군자화'라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색채를 사용하지도, 사실적인 표현을 도입하지도, 소재를 획기적으로 확장하지도 못했다. 1860년대에 태어나 전통교육을 받은 세대로서의 한계와 예술에 전심전력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제된 이성이 아니라 특유의 필묵으로 생생한 정감을 발로시킴으로써 사군자화의 내용을 바꾸었다. 서병오는 사군자화로서 '군자'가 아니라 '인간'을 표상한 것이다.

문인화는 말 그대로 문인(文人)의 그림이다. 김정희의 '세한도' '불이선란'을 비롯한 묵란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문인 회화의 한 정점이다. 서병오의 글씨와 그림은 정신성과 사의성에 가치를 둔 점에서는 같지만 중화적(中華的) 가치관에 기반한 김정희의 19세기적 문인주의 미감과 다르다. 서병오의 묵죽과 묵란에 담긴 것은 이지와 학문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이기 때문이다.

서병오에게는 풍류성, 호연지기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던지듯 휘두르는 일필휘지의 필치와 쏟아지는 듯한 발묵의 표현성으로 드러난다. 서병오의 필묵으로 표상된 풍류성, 호연지기는 곧 경상도인의, 대구인의 심상이다. 그는 호쾌한 붓질과 정감이 무르녹아 있는 먹색으로 경상도인의 기질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천연하고 거침없는 서병오의 사군자화는 그의 기질에서, 그의 인생에서 나온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성취가 유례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듯, 서병오의 사군자화가 이룬 정감의 세계 역시 유례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들의 본성이, 삶의 행로가, 시대의 성격이 다르듯 그들의 예술은 다르다. 서병오는 사군자화를 이성의 필묵에서 감성의 필묵으로 전환시켰다. 이것이 그가 인생을 바쳐 이룩한 성취다.

2012년은 구스타브 클림트 탄생 150주년, 백남준 탄생 80주년, 이인성 탄생 100주년이다. 올해의 문화예술 캘린더에 서병오의 이름이 너무 소외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인성에 대한 국가적, 대구시적 기념과 달리 서병오에 대한 기림은 들리지 않는다. 너무나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다.

'서화'의 소외는 '미술'이 등장하고 '양화'가 도입된 20세기 초 이후 동아시아 사회가 경험한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누적되어 온 것이다. 20세기를 통해 이룩한 급속한 근대화와 서구화는 가치기준의 전도와 불균형을 낳았고 근대미술사에서 서병오는 그 성취에 걸맞게 인식되지도, 평가받지도 못하고 있다. 서양 중심의 미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일방적 비판에 매몰되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지방 작가라는 핸디캡도 더해져 있다.

추사라는 위명(威名)이 아니라 진실로 김정희가 작가로서 도달한 지점에 대한 인식과 현창이 필요하듯, 석재 또한 그 실체를 규명하고 경상도와 대구의 가치로서 보편화할 방책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각 지자체는 지역 작가 현창에 열심이다. 서병오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서병오의 명작을 모은 좋은 전시회가 자주 이루어져 그의 작품을 향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할 것이며 ▷정선한 작품을 실은 작품집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이차적 향유를 확대하고 연구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며 ▷시서화 작품에 대한 밀도 있는 연구가 여러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팔능거사(八能居士) 서병오의 인물상과 그의 스토리 또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내년은 그가 다시 탄생하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구는 대구의 역사가 중요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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