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토크] 김추자(상)

입력 2012-07-19 14:03:05

1970년대 댄스머신…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현재의 장(場)에서 댄스음악은 한국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스타일로 자리하고 있다.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모습이 어느 시대건 없겠느냐마는 댄스음악의 위상이 달라진 것은 지금 시대의 특징일 것이다.

'키다리 미스터김'의 이금희(2007년 타계)가 최초의 댄스가수로 등장한 이래 시대를 상징하는 댄스가수는 늘 존재해왔지만 음악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이들이 댄스가수를 흉내 내는 모습에 웃으면서도 이내 따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댄스음악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정서다. 실컷 즐기면서도 천박하게 여기는 것이다.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계는 장르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고고 또는 사이키라고 불렸던 록음악과 대학가에서 유행한 포크음악이 청년문화를 주도했고 퇴폐와 왜색으로 한풀 기가 꺾였지만 트로트도 여전히 기성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있었다. 하나의 흐름을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소울이나 블루스, 재즈적인 어법도 엿볼 수 있었고 컨트리나 국악풍의 노래도 있었다. 이 시기 수많은 걸출한 스타들이 등장했지만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김추자였다.

김추자는 사실 대중음악과는 인연이 없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10대 후반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주최한 '국제민속축제'에 참가해 고전무용으로 입상한 것이 무대와의 인연이었다. 고등학생 때 응원단장과 강원도 대표 기계체조 선수를 했다고 하니 끼는 이미 내재해 있었을 것이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동국대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김추자의 능력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신중현의 동생 신수현이었다. 신수현의 추천으로 신중현을 찾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찾는 신중현의 작업실에서 김추자의 존재는 부각되지 못했다. 때마침 신중현은 가수 김상희와 앨범 작업 중이었고 국악과 록음악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때라 신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던 상황이었다.

대충 쓴소리 한 번 하면 돌아가 버리는 것이 당시 연습생들의 모습이었지만 김추자는 달랐다. 김추자는 매일 신중현의 작업실을 찾아 연습에 몰두했다. 결국 신중현은 쫓아낼 요량으로 일종의 오디션을 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김추자의 잠재된 끼를 확인하게 된다. 마침 국악 특히 창을 록음악에 수용할 방법을 고민하던 신중현은 김추자에게 실험을 시도하게 되고 1969년 10월, 신중현과 뉴덩키스의 반주로 완성된 데뷔 앨범이 공개된다.

신중현이 구사한 낯선 사운드와 어린 여대생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과감한 모습은 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이내 열광으로 바뀐다. 앨범에 수록된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늦기 전에'는 소울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화제가 된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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