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학업성취도 평가, 문제는 출제 방식이다

입력 2012-07-17 07:45:15

기말시험 시간, 'before'를 우리말로 옮겨 적으라는 문제에 꽉 막힌 학생이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답안지에서 '전'이라는 말을 어떻게 훔쳤답니다. 그런데 그 공부 잘하는 친구의 답을 그대로 베껴 쓰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또 혹시라도 나중에 선생님한테 추궁당할까 봐 그 '전'을 '찌짐'이라고 번안해 써넣었다지요. '전'(前)을 '전'(煎)으로 둔갑시킨 이 학생의 행위에 웃음부터 터져 나오는 것은 왜일까요?

이 학생의 애교스런 부정행위에 견주면, 지난 6월 26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를 치르면서 일부 학교가 연출한 편법과 부조리는 가히 범죄 수준입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평가 당일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부진한 학생을 짝 짓는 식으로 좌석을 재배치하여 부정행위를 조장했는가 하면, 또 어느 중학교에서는 부진아가 안 나오는 학급에 피자를 돌리겠다거나 성적 향상도가 가장 높은 학급은 에버랜드로 졸업여행을 보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학생들로 하여금 서로 상의하면서 문제를 풀도록 유도했다는 뒷말도 나돌았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시험 문제의 형식에 있다고 봅니다. 시험도 공부이며, 출제 방식이 공부 방식을 이끌어 가는 상황에서 그 시험문제의 형식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언제부턴가 시험 하면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떠올립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풀고 있는 문제집에서부터, 각종 면허나 자격시험을 위한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객관식 문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1억원의 돈을 내건 TV의 퀴즈쇼 문제도 객관식이고, 노래자랑 중간에 출연자들에게 푸짐한 경품을 안기기 위해 던지는 문제도 객관식입니다. 그 문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억지로 단 하나의 정답과 나머지 오답을 만들려다 보니 물음과 답지의 내용들이 그 내용에 관한 공부의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한 암호풀이식 언어유희로 치닫는 경우도 흔한데도 말이지요. 말 그대로 객관식이 일상화된 5천만 국민의 삶의 현장입니다.

객관식 시험은, 응시자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남이 만들어 놓은 네댓 가지의 답지 중에서 마치 보물찾기하듯 숨겨놓은 단 하나의 답을 선택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리고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면 답을 찾아서 더듬어간 사유의 과정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의 작은 떨림도, 사색의 신중한 망설임도 허락되지 않으며 다양한 가치의 스펙트럼보다는 오로지 단 하나의 정답을 잘 골랐느냐의 여부로 모든 걸 판정하는 시험입니다. 이처럼 가차없는 획일로 사고의 들판에다 억압과 제한과 한계의 철조망 울타리를 치도록 만드는 객관식 시험, 이 시험을 통해 길러지는 것은 분명 '찍기의 기술'이며 '선택능력'이지 우리가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길러주어야 할 '창조능력'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무엇보다도 효율적인 시험 관리를 위해서 객관식 시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교육의 마당에서 효율성은 으뜸 자리에 놓일 가치가 아닙니다. 교육의 목적에 어긋나는 방법이나 평가 시스템은 학생들의 앎에 대한 진정성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을 온전하게 열어주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삶의 대부분을 학교 교실과 학원의 밀실에 갇혀 '세계 최장의 학습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이 시험의 허들을 넘는 순간순간에 주어지는 그 문제들이 정말 자신들의 삶을 의미 있게 열어주는 공부의 단초들이어야 의미가 있지요. 늘 공부노동에 시달리며 기진맥진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 객관식 문제를 끊임없이 들이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좋은 교육 장면이 아니지요.

효율성 강조 시책이 어떻게 교육현장의 멱살을 잡아끄는지는, 다음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글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오엠알카드에 정답을 표기하는 방법을 집중 훈련하고 있다.// -문제 번호와 카드 번호를 꼭 일치시켜야 해요./ -동그라미 밖으로 칠이 튀어나오면 안 돼요./ -반드시 수성 싸인펜을 사용해야만 해요./ 하나의 번호에만 칠해야 해요./ -체킹을 잘 하는 것도 실력이랍니다.// 공부하기도 힘들고/ 시험 문제 풀기는 정말 어려운데/ 답을 표기하는 방법까지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우리는 눈동자를 뱅뱅 굴리며 정답 표기 방법을 익힌다.'

어떻습니까? 시험 관리의 효율성 제고 시책에 협조하고자 눈물겹게 애쓴 우리 학생들에게 교육과학기술부는, 평가결과 점수를 내밀어 윽박지르기에 앞서 우선 막대사탕 하나씩이라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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