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끝-道界마을을 찾아서] <2>봉화 우구치마을

입력 2012-07-11 07:01:34

남편은 봉화에 아내는 영월에…한가족 딴 주소지

강원도와 경상도를 갈라 놓은 다리 위에서 마을을 오가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강원도와 경상도를 갈라 놓은 다리 위에서 마을을 오가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강원도 교육청 소속 학교였지만 경상도 학생들이 다니던 조제분교. 지금은 폐교됐다.
강원도 교육청 소속 학교였지만 경상도 학생들이 다니던 조제분교. 지금은 폐교됐다.
마지막 남은 광부 이종식 씨가 이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광부 이종식 씨가 이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영동선 철로를 개설할 때 직선 구간인 철로를 춘양 시가지를 경유하도록 '억지로 노선을 변경'해서 '억지춘양'이란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곳. 붉은빛이 돌아 적송으로 불리는 '춘양목(春陽木)의 집산지'요, '경북의 시베리아'로 불리는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우구치 마을. 춘양면 소재지에서 88번 국도를 따라 영월 방면으로 약 20㎞ 가면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인 우구치마을에 이른다. 이곳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전 하동면) 내리마을로 갈라지는 한 마을 두 동네가 있다.

이 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경상도 우구치마을 조제와 강원도 내리마을 조제가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두 마을을 합해 조제리라고 한다. 폐광의 흔적들이 역력한 우구치 마을은 빈집이 더러 있지만 아직 폐촌은 아니다. 빛바랜 농막에는 옛 영화를 그리며 이곳을 떠나지 못한 촌로들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한 귀농인 13가구 40여 명의 주민들이 오손도손 삶의 터전을 일궈가고 있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논농사는 없다. 고랭지 채소와 감자, 옥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있다.

1970년대 금광의 영화가 사라지고 하나 둘 떠나면서 우구치 마을의 역사도 함께 변했지만 옛 영화를 꿈꾸는 이곳 주민들은 새로운 영화를 설계하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곧 들어오기 때문이다.

◆표지석만 갈라놓은 한 마을

도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95년 경북도~강원도를 잇는 도로 확장'포장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지역 간, 주민 간 교류도 활발해졌다. 비록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지역 경계도 없고 마음의 경계는 더더욱 없다. 그저 마을과 마을 사이를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 위에 가로놓인 다리 양쪽에 서 있는 도 경계 표지판만이 행정구역상 경계임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도래기재 너머에 있는 우구치 마을이 왜 경상도 땅이 됐을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도래기재 정상에 경상북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행정구역상 경계는 도래기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래기재를 넘어 차로 강원도 방향으로 20분쯤 달려야 도 경계가 나온다. 우구치리와 영월 김삿갓면 사이의 폭 10m, 길이 20m 남짓한 다리(조제 2교)가 그 경계다. 지형상으로는 도래기재를 도 경계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 도 경계는 조제2교 '꼬마다리'인 것이다.

봉화군청 이문학(57) 주민복지담당은 "조선시대 임금이 한강이 위치한 서울에 팔도의 물을 다 모으고 싶어서 강원도에 가까운 봉화 춘양면 우구치마을을 인위적으로 경북 봉화 땅에 속하게 했다"며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전기요금은 봉화한전에, 전화요금은 강원도 영월군에 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동리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이경숙(44'여'영월군 김삿갓면) 씨는 "도 경계와 상관없이 동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며 "마을 체육대회, 집안 대소사 등에 동참하고 눈만 뜨면 휴게실에서 만나 온 종일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동네 자랑을 늘어놓았다.

경상도와 강원도 도계를 사이에 두고 넓은 벌판이 형성된 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조제휴게소와 조제분교는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다.

이곳에서는 매일같이 경상도와 강원도에 주소를 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부침개도 구워 먹고 만둣국도 끓여 먹고 토종닭도 잡아 푸짐한 상을 차린다.

조제휴게소를 운영하는 김정희(61'여'영월군 김삿갓면 내리) 씨는 "요즘 같은 농번기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지만 농한기가 되면 매일같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먹음직스런 음식 상 차려놓고 한 해 농사를 이야기하며 자식 자랑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김 씨 부부도 도계를 넘나드는 이색적인 삶을 살았다. 10여 년 전 자녀 학업 문제로 남편 임병도(67'춘양면 의양리) 씨는 봉화에, 부인 김 씨는 휴게소 운영으로 강원도에 주소를 두고 산 것.

임 씨는 "애들이 대학에 간 후 살림을 합치려 했지만 아직 집이 그대로 있어 합치지 못하고 있다"며 "이곳 사람들은 행정구역은 나뉘어 있지만 마음은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요즘 신명이 나지 않는다.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던 강원도 영월군 옥동초교 조제분교가 지난해 3월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한 뒤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10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던 이 마을의 마지막 남은 학교였다. 학교는 강원도 학교였지만 학생들은 대다수 경북지역 학생들이었다. 쇠사슬로 채워진 학교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다. 운동장 곳곳에는 풀이 가득하고 무더위에도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김정희 씨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이었지만 마을의 웃음거리였는데 이제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텅 빈 학교를 쳐다보면 섭섭하다"며 "폐교 당시 2명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한 명은 영월군 중동면 녹동초교로, 한 명은 봉화 춘양면 서벽초교로 옮겼다"고 말했다.

특히 이 마을 사람들은 경북과 강원도를 잇는 경계 지점에 산다는 이유로 양 도로부터 소외받기도 했다.

대다수 주민들의 생활권은 봉화 춘양면인데, 강원 영월군과 경북 봉화군을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이곳까지 운행을 하지 않아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상준(79) 씨는 "도 경계 지역이다 보니 시내버스 사각지대"라며 "춘양장을 보러갈 때나 영월장을 보러갈 때는 이웃의 농사용 차를 얻어타야만 한다. 강원도 쪽이든 경상도 쪽이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영화를 누렸던 금정광업소

금정광업소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금정리)에 있는 금 '은 광산이다. 현재는 폐광이 된 상태로 산림 복구가 완료됐다. 자연금이 나왔던 곳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금은 모두 도래기재를 통해 운반됐다. 마을 입구에는 '우구치리'라는 돌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금정'이라는 이름을 더 친숙하게 부른다. 일본인들이 금광을 개발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 금광에서는 물이 많아 나와 금을 캐는 것이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봉화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금광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이가 많을 정도다. 그러나 한창때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가는 금 산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금이 많이 나오는 금광이었지. 한 달에 200㎏ 이상 생산하면 보너스도 줬다"는 이종식(84) 씨는 금정광업소에서 근무했던 몇 안 되는 생존자다.

이 씨는 "해방 무렵부터 금이 줄기 시작해 한국전쟁이 끝난 후 대명광업소가 금을 캤고 나중에 들어온 함태광업소는 몇 군데 시추했지만 금맥을 못 찾았다"며 "이제 이곳에는 금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을 둘러싼 각종 소문은 무성하다.

이 씨는 "'일본인이 캐간 것은 금송아지 뒷다리 부분이고, 아직까지 몸통은 남아있다. 광을 아래서부터 뚫어야 물이 안 차는데 꼭대기부터 뚫어서 물이 차 채광을 하지 못한다. 금맥은 있는데 광부들이 도둑질을 해서 적자가 난다'는 말이 나돌지만 대부분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금정광산에 얽힌 유래도 있다. 태백산에는 금송아지 두 마리가 살았는데, 한 마리는 북쪽 끝 금대봉 어딘가에 묻혀 있고 한 마리는 남쪽 끝 구룡산 자락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금송아지를 찾으려는 이들이 금대봉에 다녀갔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남쪽 구룡산 자락에 묻혀 있던 금송아지는 강원도 정선에 살던 김태연 씨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금정광산이다. 김 씨는 일본인에게 광업권을 넘겼고, 이때 받은 돈은 50대 재벌에 들어갈 정도로 많은 돈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금광이 개발되고 이후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근근이 명맥을 이어왔지만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한 광업주들이 스스로 폐광했다.

이 씨는 "금광 개발이 한창일 때는 상주 직원만 3천 명에 달해 1만2천여 명이 이 골짜기에서 살고 있었고, 상설시장도 있었다"면서 "1960, 70년대만 해도 마을에는 여관과 극장이 있었고 도래기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색시집도 서너 개나 있어 밤이면 불야성을 이뤘다"고 말했다.

봉화'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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