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宅은 살아있다] <25>성주 한개마을

입력 2012-06-20 07:52:30

북비고택 고관가옥 특색 그대로…한옥주택사 귀중한 문화재

한개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과 같이 마을 전체가 2007년 민속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됐다. 조선 세종 때인 1450년쯤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해 후손들이 560여 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은 북비고택, 한주종택, 교리댁, 월곡댁 등 지정문화재와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유산이 전통의 향기를 간직한 채 보존되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전봇대를 땅에 묻고 퇴락한 가옥을 복원하고 정비해 옛 모습을 살리려는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입구 관광안내소 왼쪽 길을 올라가면 진사댁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두 갈래 길의 왼쪽에 교리댁과 북비고택, 월곡댁의 고풍스런 고택과 함께 돌담길이 늘어서 있다. 색깔과 크기,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황토 흙으로 쌓은 토석담은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고향길을 떠올린다.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하회댁과 극와고택, 도동댁, 한주종택 등 유서 깊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인재의 마을

한개마을 입향조 이우는 성산 이씨 정언공파 파조인 이여량(李汝良)의 장자이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 등을 지냈다.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한 이우의 6대손 이정현(李廷賢)은 광해군 4년(1612) 식년시에 병과(丙科)에 급제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됐지만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마을의 성산 이씨는 이정현의 후손들이다. 이정현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계기로 이 마을에는 모두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조선 영조 이후부터 19세기에는 이석구(李碩九), 이해진(李海鎭), 이석문(李碩文), 이규진(李奎鎭), 이민실(李敏實) 등을 배출했고, 이원조(李源祚)와 이진상(李震相)이 출사하면서 양반마을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이원조는 학자 출신 관료로 영남 주리학 이론 정비와 학통 수수에 기여했다. 그는 자식과 조카들을 모아 가학(家學)을 전수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 조카 이진상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대성시켰다. 한주(寒洲) 이진상은 당시 정치가 문란해지자 국가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한 묘충록을 저술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1876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화의 성립으로 중단했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중심사상으로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학풍을 이끌던 제자 곽종석, 허유, 이정모, 윤주하, 장석영, 이두훈, 김진호 등 '주문팔현'을 중심으로 한주학파를 형성했다.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와 이기형, 이기정, 이기원, 이기인, 이기윤 등이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상실에 직면하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충절과 가학(家學) 전승의 전통을 간직한 북비고택

북비고택은 한개마을 성산 이씨의 발상지이다. 조선 초 성산 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 종택이 있었던 곳으로 이후 대초당(大草堂)으로 부르면서 경종 1년(1721) 처사 이이신(李爾紳)이 매입하고 수리해 북비고택의 터전을 잡았다. 북비고택의 명칭은 이이신의 아들 이석문(李碩文)이 참혹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남향의 문을 북향으로 고친 데서 유래한다. 영조 50년(1774)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훈련원 주부(主簿)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혹하게 죽은 후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사립문(北扉)을 내고 평생을 은거하며 지냈다. 순조 21년(1821) 이석문의 손자인 사헌부 장령(掌令) 이규진(李奎鎭)이 정침을 신축했다. 그의 아들인 공조판서 이원조(李源祚)가 헌종 11년(1845)에 기존 건물을 증축해 사랑채인 사미당(四美堂)과 경침와(警枕窩)를 짓고 폐허가 된 북비채를 중건했다. 고종 3년(1866) 대문을 솟을대문으로 증축하고, 순종 4년(1910) 5월에 사당을 증축하는 등 수차례 증'개축을 반복했다. 북비고택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종1품 판중추부사의 직에 오른 이원조가 학문을 닦고 가학을 전수한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 있다. 북비고택은 현재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채, 대문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는 별도의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원래 북비고택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는 중문간채, 방앗간,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래채는 안채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독립사랑채, 안채의 '口'자형 배치 및 솟을대문 등은 당시 고관 가옥의 특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한옥주택사(韓屋住宅史) 편년에 기준이 될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이곳에는 종손인 이수학(74'전 대구남부도서관장) 씨 내외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성리학의 전통을 잇는 조운헌도(祖雲憲陶)의 뜻을 담은 한주종택

한주종택은 한개마을의 가장 안쪽인 동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李敏儉)이 창건하고 1866년 이진상이 중수한 건물로 지금의 집은 그때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안주인이 상주 동곽(東廓)에서 시집왔다 하여 '동곽댁'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연한 풍정과 함께 집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고 골목과 담장 주위의 노송 경관이 매우 인상적이다. 한주종택은 창건주로부터 4대를 거쳐 조선 말기 대표적인 유학자로 알려진 이진상을 배출, 그와 관련된 유산이 상당수 남아 있다. 먼저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주하는 사랑채는 '주리세가'(主理世家)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집이 성리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10년에 그 문인들이 글방으로 건립한 건물은 이진상의 호를 따서 한주정사라 한다. 정사에는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 현판이 걸려 있다.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주희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든다는 뜻의 현판에서 이진상의 학문적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주종택은 한주의 아들인 이승희와 손자들인 이기원, 이기인 등 삼부자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한주종택은 성리학의 대가가 머물렀던 가옥의 의미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애국 충절의 정신이 깃든 가옥이다. 집은 글방인 한주정사가 있는 일곽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일곽으로 나누어져 있다. 정사로 들어가는 대문은 남대문,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동대문인데 이 대문은 약 50년 전 초가를 개조해 만들었다. 정자와 안채 사이에는 담장을 쌓았고 출입할 수 있는 협문(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과 일각문 등이 있다. 안채는 남향 일자의 정침과 좌측에 동향일자 3칸의 고방채가 있다. 우측에 서향일자 3칸의 아래채가 있고, 정침과 대향하는 남쪽에 7칸의 일자형 중문채 등 4동이 튼 'ㅁ'자를 이뤄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이 마을의 안채 배치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적인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해 1월 25일 종부가 작은방의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후 설맞이 음식을 준비하다 화재가 발생해 안채가 전소됐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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