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책쓰기는 쓸쓸함을 에너지로 만든다

입력 2012-06-19 07:26:47

좋아. 우리의 문제가 비롯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그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어/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 가도 행복해질 수 없어.(박태현의 '소통' 중에서)

토요일 오후, 약간은 따스한 바람이 부는 어느 고등학교 교실.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회계사, 공인 중개사, 통계학자, 고등학교 선생님, 동시 통역사, CEO, 작가, 대통령….' 대통령이란 말에 몇몇 학생들이 멋있다고 반응했다. 갑자기 한없이 쓸쓸했다. 아이들의 대답은 자신의 미래를 단지 현재의 기준과 결부시켜 선택한 것일 게다. 꿈은 '꿈'이 아니라 '꾸다'는 동사라고 말하면서도 내 안은 여전히 쓸쓸했다.

요즘 나는 부당하고 불편하고 부정적인 풍경을 만나도 분노로 드러내진 않는다. 대체로 슬프거나 쓸쓸했다. 어쩌면 2012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슬픔과 쓸쓸함은 내가 살아있음에 대한 증거다. 그 나이 또래의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난 그들처럼 꿈을 말하면서 살았을까?

사실 나는 꿈을 꾸지 못하고 그 시절을 살았다. 막연하게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가졌지만 그건 미래를 향한 고민이 낳은 결과라기보다 현재와 내 기호가 결합한 것이었다. 그게 선생님이 된 나를 지배했다. 난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서는 가장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다른 영역은 내 삶의 시간과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삶은 한없이 곤고했고, 무의미했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분노를 알았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내 마음과 다른 사회의 모습들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나도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에게 분노했고, 냉정하게 나를 버려두고 사라지는 존재들에게 분노했다. 조금씩 물질로 규격화되어가는 세상의 풍경과 더불어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내 삶에서 전혀 내 길의 에너지가 되지 못했다. 분노는 대상을 향한 무조건적인 미움과 비난만 자라게 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분노가 가득하던 그 자리에 쓸쓸함이 채워지기 시작한 건 그리 멀지 않다.

나는 이제 안다. 분노보다도 슬픔과 쓸쓸함이 더욱 강력한 에너지라는 걸. 삶이 깊어지면 때때로 머물 곳도 필요하다. 쓸쓸함은 강력한 에너지로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문득 그 쓸쓸함으로 인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가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 거기'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 쓸쓸하지만 사람들이여. 쓸쓸하지만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 희망을 노래해야 함이 또한 내 길이 되리라. 쓸쓸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가면서 쓸쓸함을 내 마음 안에서 키울 게다. 그 쓸쓸함이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 수 있도록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길을 걸을 게다.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는 그 시간을 만날 게다.

난 알고 있다. 내 지금의 쓸쓸함이 절망으로 인한 쓸쓸함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는 그 절망의 시간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게다. 그리움과 쓸쓸함을 노래할지언정 절대 절망을 말하지는 않을 게다. 누군가의 말처럼 더 '인간적인 사회'를 꿈꾸지 않고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꿈꿀 게다. 오늘도 아이들은 친구들보다 한 등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할 게다. 그것조차 그들의 미래를 위한 쓸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게다.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내가 꾸는 꿈은 이렇다.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그대들이 오히려 훨씬 큰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 책쓰기는 보잘 것 없는 그대를 훨씬 큰 그대로 이끌어주는 길을 여는 열쇠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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