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는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과 친해 자주 어울렸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함께 분개했다.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의친왕은 상해 망명을 시도하다 일본군에 잡혀 실패,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의암은 "10년 안에 국권 회복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11년 어느 봄날 세상 이목을 피해 서울 우이동 골짜기서 몰래 만나 빼앗긴 나라를 걱정했다. 그해 가을 의암은 천도교 간부들과 그 계곡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계곡 산림지대 일대 땅(2만7천946평)을 매입하도록 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독립 의지를 고취시킬 교육과 이를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1912년 3월 7일 시작한 공사는 그해 오늘 끝났다. 이튿날 낙성식을 갖고 '봉황각'(鳳凰閣)이라 명했다. 이후 봉황각에선 전국 천도교 고위 교역자 483명이 국권 회복을 위한 특별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뒷날 1919년 3'1 만세운동 때 전국 각지의 선봉이 됐다. 당시 천도교 전국 조직 동원이 가능했던 것은 의암의 앞선 혜안 덕이었다. 서울시는 이런 봉황각을 1969년 서울시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했다. 올해 봉황각 건립 100년 의미가 남다르다.
정인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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