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절반은 雪國…따로 떨어진 집마다 독특한 겨울나기
화산 분화구 속에 자리 잡은 울릉도 '나리마을'. 울릉도 개척민들이 130여 년 전(1882년)부터 화산 분화구 중심 주변에 너와집과 투막집을 짓고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나리마을은 울릉도에서 지리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산 성인봉(해발 986.7m)과 천두산, 형제봉이 주변에 천길 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거대한 암벽들과 화산 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 생긴 화구원으로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나리분지는 동서 1.5㎞, 남북 2㎞로 면적이 198만㎡에 이른다. 눈 씻고 찾아봐도 평지라고는 없는 울릉도에서 나리분지는 육지의 평야에 버금가는 광활한 들녘인 셈이다. 주변 서쪽지역 알봉마을 분지를 포함하면 330여만㎡에 이른다.
12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겨울철이면 3, 4m 이상의 폭설이 자주 내려 국내 최대 다설지(多雪地)로 유명하다. 강설량이 많은 이 마을은 개척 당시부터 자연조건에 맞는 가옥 구조를 한 너와집과 투막집 구조의 '우데기'는 겨울철 주거 생활을 가장 합리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나, 오늘날에는 주택개량사업 등으로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너와집 1동과 투막집 4동이 유일하게 남아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주변 산기슭에는 울릉국화 섬백리향 군락지 등 섬 특유의 식물군과 함께 원시림이 잘 보전돼 있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나리마을의 형성과 변천
울릉도 관문 도동항에서 일주도로를 타고 서면을 거쳐 북면의 천부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1시간 버스를 타고 북면 천부마을 면소재지에서 내려 나리마을까지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를 갈아타고 4㎞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달려 올라가면 분화구 속에 자리 잡은 나리마을과 함께 주변 계곡에는 6월 말까지 잔설이 남아 겨울을 연출하기도 한다.
나리마을에는 청동기시대(BC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BC 300~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고인돌 형태의 흔적(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이 남아있다.
우산국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 년 동안 비워 오다 1883년(고종 20년) 개척 초기 당시 나리마을에는 93가구 500여 명이 정착해 살았을 정도로 번창했다. 하지만 드넓은 나리분지는 화산재로 이뤄져 논 농사가 불가능한 척박한 땅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감자 옥수수 더덕 삼나물 참고비 천궁 등 산나물과 약초를 재배해왔다.
집중 호우 때는 일시적인 호수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즉시 빠져 버린다. 이처럼 침투된 지하수는 북측사면 250m 지점에서 용출돼 수력발전소 용출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17가구 40여 명의 마을주민들이 식당, 숙박업을 병행하면서 관광형 농촌으로 부상해 억대 부농 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리'라는 지명도 과거 개척민들이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이주민들 중에는 경상도 지방보다 전라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군지는 기록하고 있다.
개척 초기 이들은 각각 이전에 살던 지역의 말씨를 주로 사용하며 생활해왔지만 1900년(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됐다 1906년(광무 10년) 경상남도에 편입됐고. 1914년 다시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이속하면서 지금은 지역민 대부분이 경상도 말씨를 사용하고 있다.
◆너와집
평지가 시작되는 나리마을 어귀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6호 울릉 나리 '너와집'(북면 나리 124번지) 1동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2007년 12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집은 1882년 개척 당시 섬지역 재래의 집 형태를 구재(舊材)를 활용해 1940년 건물이 있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목조 건물이다. 4칸 측면 일자집으로, 지붕은 너와(나무판자)로 이었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너와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 놓았다. 큰방과 중간방, 갓방은 모두 귀틀구조로 되어 있는데 큰방과 작은방은 정지(부엌)에서 내굴로 되었고, 갓방은 집 외부에 별도로 아궁이를 설치했다.
집 주위는 전부 나무판자 우데기를 돌출시켜 마감했다. 앞부분에는 폭을 넓게 잡은 축담이 있고 가옥과 멀리 떨어진 마당을 지나 정낭(화장실)을 설치했다.
눈이 많이 오는 섬 지역 특유의 자연조건에 따라 내부는 통나무 귀틀구조의 목조 가옥 형태다.
매년 4월까지 해의 절반이 겨울인 나리분지 마을의 겨울나기는 독특하다. 전통가옥인 너와집과 투막집 처마 끝에서 땅바닥까지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자나 억새, 옥수숫대로 외벽을 설치한 '우데기'는 겨울철 가옥 전체가 눈 속에 파묻힐 경우를 대비해 집안에서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민이 고안해 낸 매우 유용한 이중외피구조이자 완충공간인 셈이다.
◆투막집
투막집은 나리분지 마을에 2동, 서북쪽 알봉분지 지역에 2동 등 모두 4동이 남아 있다.
울릉도 투막집은 130여 년 전 강원도 개척 이주민에 의해 건축된 울릉도 고유의 전통 주거형식으로, 기후 특성에 순응하며 전래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투막집 제256호(북면 나리 124번지)와 제182호(북면 나리 117-4번지)는 나리분지 마을 입구에 남아있고, 제257호(북면 나리 1길 71-316번지)와 제183호(북면 나리 307외 2필지)는 여기서 2㎞ 떨어진 남서쪽 알봉 분화구 인근에 자리 잡아 각각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투막집 제256호와 제182호는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7년 울릉군이 매입 후 보수 관리하고 있다. 이 집은 4칸 ㄱ자 집으로 큰방, 중간방은 내굴로 되어 있고, 갓방은 집 외부에 돌린 우데기를 돌출시켜 별도의 아궁이를 설치했다. 집 주위는 전부 우데기를 돌리고 앞부분에 폭을 넓게 잡은 축담은 생활, 작업, 저장 공간으로 활용된다.
울릉도 투막집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귀틀벽과 우데기라 할 수 있다. 귀틀벽은 통나무 양끝에 홈을 파고 이 홈을 이용해 무너지지 않도록 우물틀 모양으로 쌓아 올린 후 통나무 사이의 틈을 진흙으로 메워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했다.
알봉 분지에 남아있는 제257호와 제183호도 1984년 12월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후 2007년 12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울릉군이 토지와 가옥을 매입해 보수'관리하고 있다. 이 집은 4칸 일자 집으로 큰방, 머리방, 정지를 사이에 두고 마구간도 전부 귀틀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은 주변 산지에 자생하는 참억새를 바람에 날리지 않게 다래 줄기 또는 머루넝쿨로 얽어매었다. 마루가 없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제183호 투막집의 경우 조선 말기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한 투막집으로 1984년 원래 건물이 있던 자리에 개축한 것이다. 정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 1칸씩이 배치돼 있고 벽은 귀틀로 짰다. 정지 바닥은 죽담보다 낮게 계단을 놓아 오르내리도록 했고, 부뚜막은 아궁이에서 내굴로 되어 있다. 마루가 없고 많은 기능이 본채에 집중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리마을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
나리'알봉마을 분화구 주변지역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화산섬 생성과정이 그대로 보존된 곳으로 화산지역 특유의 지형과 기암괴석 등 지질유산이 풍부하다. 또 섬백리향, 섬말나리 등 희귀 멸종 위기 식물의 자생지다.
최근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마을 인근 나리 야영장 이용객과 함께 연간 30만 명 이상의 탐방객들이 몰리면서 발생하는 쓰레기 처리와 마을 주변 군부대의 오폐수 처리시설 등이 상수원 주변의 자연환경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농민들은 자연생태계 보전을 위해 친환경농업을 해오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섬 지역 유일의 상수원 원류지역인 분화구를 지키고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주변에 자리 잡은 군부대 이전 등의 국토 이용에 관한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울릉'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