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48]문학평론가 오양호의 칠곡군 동명면 송산리

입력 2012-06-09 08:00:00

하늘 같은 왕소나무 그네 타다 보면, 산마루 걸린 저녁노을이 웃음 짓던

초등학교 때 자주 소풍왔던 팔공산 자락 송림사. (위) 운동회의 추억이 그리운 동명초등학교.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가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이다, 삶은 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내 고향 동명 송산리는 평화로운 농촌이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째 이지만 내 심리(心裏)에 고향은 늘 나의 현재다. 화려한 도시에서 고독과 외로움이 밀려 올때 나는 지금도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오양호 문학평론가. 인천대학교 인문대학장
초등학교 때 자주 소풍왔던 팔공산 자락 송림사. (위) 운동회의 추억이 그리운 동명초등학교.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가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이다, 삶은 밤,
오양호 문학평론가. 인천대학교 인문대학장

유월에 돌아온 고향, 송산리

오양호(문학평론가)

내가 사는 서울 반포동 래미안 아파트에는 소나무가 아주 많다. 그리고 그 나무들 대부분이 장년의 남자를 닮은 적송(赤松)이다. 이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 심산(深山)의 정취를 내뿜는 소나무를 조석으로 보는 것은 즐겁다. 첩첩산중 찬바람 맑은 물에서만 살았기에 그 기골이 장대하고 품격이 속되지 않아 이악스런 사람들의 눈에 뜨여 장삼이사가 들끓는 대처로 팔려온 소나무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차 소리, 사람 소리, 배기가스, 먼지 많은 도심 속에서도 심산유곡의 청정한 기품을 그대로 지니고 한강 쪽으로 가지를 뻗고 좌선하듯 서 있다. 떠나온 고향 냄새가 강물에 섞여 흘러내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가끔 이런 소나무 밑에 앉아 심호흡을 한다. 소나무 냄새를 맡아볼까 해서다. 소나무가 많아 동네 이름이 아예 '송산동'이었던 내 고향 칠곡군 동명면 송산리는 그 이름처럼 사방천지가 소나무다. 그래서 나에겐 소나무가 나무가 아니다. 짜개바지 동무다.

나는 송산동에서 십 리가 넘는 동명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나와 학교를 다녔고, 거기서 직장을 잡아 20년 넘게 살다가 서울로 왔다. 내가 고향 송산동에서 산 시간은 내 생애 중 가장 짧다. 그렇지만 거처와는 관계없이 내 심리(心裏)에는 송산동이 늘 나의 현재다.

나는 출향 이후 반포동에서만 30년째 살고 있다. 근무처는 인천 제물포 바닷가지만 손톱이 닳도록 일만 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가 잠드신 선영과 300년이 넘는 고목이지만 아직도 봄이 오면 꽃을 피우는 큰 살구나무와 일곱 형제가 자란 낡은 집이 있는 산촌, 칠곡 고향에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이 십여 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첫 추위 오는 11월/ 보랏빛 들국화 시드는 산마을 논둑 길/ 쥐불 흔들며 내 이름 부르던 열한 살 동무의 긴 메아리/ 고궁古宮 담벽 앞에서 손을 내민다.// 청보리 밭 하얀 오솔길에 걸리던 붉은 노을/ 그날처럼 타 올라 곱지만/ 그러나 여기는 새벽마다 뿌연 안개가 방까지 스며들어/ 옹화궁(雍和宮) 라마승도 염불을 설치는/빨간 빛만 남기고 안개가 세상을 덮는/ 남의 나라'(졸작 '북경송가'-시문학 2012년 3월호).

작년 가을, 막무가내의 도시 북경에 잠시 살 때 고향을 생각하며 쓴 졸작 시의 한 대목이다.

아침마다 안개가 몰려오는 거대한 도시, 서향 아파트 텅 빈 거실에서 나는 고향의 왕소나무와 그 나무에 그네를 매어 타던 소꿉동무며 송아지, 강아지, 염소, 둥굴바위, 불당골 산마루에 걸리던 저녁놀을 그리워했다. 아내가 서울로 돌아가 버린 방에서 나 혼자 뒹굴며 빠따추(八大處)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새야 새야 국궁새야 니 어디서 자고 왔노, 수양청정 버들가지 이리 흔들 자고 왔다'는 어릴 적 듣던 민요를 흥얼거리고, 정지용의 '고향'이며, '동무생각' '아 목동아' 같은 노래를 불렀다. 청소년 시절 여름방학 때 소를 산비탈에 풀어놓고 부르던 그런 노래가 피곤한 타국살이에 고향 산천이 그리워 서럽게 가라앉는 내 마음을 조금이긴 하지만 추슬러 주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삶은 대체적으로 그가 사는 공간'장소와 결속되는 어떤 상징성 내지 속지성(屬地性)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경은 대학 캠퍼스의 소나무도 백피송(白皮松) 뿐인 모든 게 낯선 그야말로 익명의 타지였다. 그러니까 이 시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 겉으로는 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는 화려한 도시에 살지만 사실은 고독하고 소외된 존재, 바로 그런 신세로 전락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 노래를 부르며 나의 낙백한 영혼을 고향의 그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시키면서 외로움을 털어냈다.

사향(思鄕)은 객고의 우울을 치유하는 처방이다. 유년의 복원, 풍물과 풍경의 복원에 의한 원초적 행복에로의 회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현존에 불안을 느낄 때 귀향을 꿈꾼다. 나 또한 그러했다.

내 고향 동명은 매봉산과 도덕산 사이에 얌전히 엎드린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장날이 오면 소시장도 서고, 비단 포목상도 전을 벌이고, 신발 가게며, 국밥장수, 엿장수가 팔거천 방축까지 자리를 잡는 활기 넘치는 촌락이었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되면 가천동, 구덕동, 송산동, 기성동 등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가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자리를 잡고 앉아 동창을 만나고, 외사촌도 만나고, 재 넘어온 사돈도 만나 사이다, 삶은 밤, 감, 고구마를 나눠 먹었다. 자기 딸이 달리기 일등을 한 자랑, 올해 동 대항 연속달리기에서 자기 마을이 꼴찌를 한 이유, 가을걷이며, 동네방네 소문난 옆집 처녀 정분 난 이야길 침을 튀기며 나누다가 막판엔 막걸리를 한잔씩 걸치고는 형님 아우 잘 가라며 옷자락 흙먼지 털며 절하고 돌아서던 곳이다. 한마디로 의좋은 농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운동회 날 술에 취해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던 당숙도 없고, 초등학교 측백나무 울타리 싱싱한 빛깔도 저 혼자 반짝이고, 아이들이 개구리처럼 뛰어들던 태봉산 밑 푸른 웅덩이도, 책보를 ×자로 메고 논둑길을 오리 떼처럼 오가던 아이들도, 가산산성, 송림사 소풍 가던 하얀 길도 없다. 모두 세월'시간이 거두어 가 버렸다.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의 시간은 무의미하다. 시간은 그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만물의 영장 인간도 이런 시간의 힘을 거역하지 못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주를 다스리면서 오직 한 번 머물다가 종적 없이 사라지는 전지전능한 어떤 실체인 까닭이다.

이런 시간'세월이 내 고향, 옻나무가 많아 칠곡(漆谷)이고, 소나무 동네라 송산동이고, 바위도 비단 같아 금암동(錦岩洞)인 청정지역 칠곡 동명을 조금 낯설게 만들어 버렸다.

동명 송산리에 와 보지 않고는 소나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옻나무가 밭을 이룬 산동네 옻밭에 와 보지 않고는 민초의 생리가 무엇인지, 나무와 바위가 어울려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는 금암동의 태생 이치를 알지 못한다. 안동으로 가는 국도변, 칠곡 읍내 조금 지난 '나박뜸모리' 그 절벽에 피는 진달래며, 5월 아침이슬로 세수하고 나온 싸리나무의 연녹색 숲을 보지 않고는 나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이랴. 태봉산 바위를 감싼 수양버들, 처녀 아랫도리 같이 터질 듯 피어나는 참나무의 새순을 보지 않고는, 송림사를 둘러싼 금강송 숲이 6월 산바람과 만나 정담을 나누는 초하의 동명을 보지 않고는 평화를 알지 못한다. 가산성 산마루에 배꼽마당만 한 '가산바우' 가운데 우물이 생긴 전설이며, 송림사 5층 석탑이 구부러진 내력, 다부동 전적비를 보지 않고는 호국을 말하지 못한다.

구덕동의 부도군, 봉암동의 고분군, 송산동의 돌덧널무덤, 기성동의 3층 석탑이 장구한 역사와 함께 사는 농촌, 매봉산과 도덕산에서 발원한 팔거천이 흐르는 고향 칠곡 동명에 가고 싶다. 종증조부 일성정(日省亭) 옆에 초당(문학관) 한 채 지어 출세도 공부도 결국은 귀향으로 마무리되는 인간 이치 되새기며 나도 적송처럼 늙고 싶다. 아, 나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내 고향 동명(東明)이여 영원하라!

오양호; 문학평론가. 인천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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