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세상은 변한다, 우리는?

입력 2012-06-06 10:48:16

대학 시절, 큰마음 먹고 일본 파나소닉사의 워크맨을 구입한 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카세트테이프와 라디오를 들을 수 있던 최첨단 전자제품인 워크맨은 당시 20만 원을 호가했다.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주위의 '부러움'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세계 최강의 전자 왕국 일본은 영원할 것 같았다.

지금 일본 전자 업계는 대규모 구조조정의 강풍에 휩싸여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불어닥쳤던 대규모 감원에 이어 3년 만에 또다시 대규모 감원이 진행되고 있다. 종업원의 안정적 고용을 최우선으로 하는 일본 기업 문화를 생각해 볼 때, 최근 인력 구조조정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일본 전자 업계가 '생존의 위협'을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감원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 언론의 보도를 보면, 파나소닉은 본사 인력 7천 명 중에 3천~4천 명을 올해 안에 구조조정하기로 했다. 파나소닉은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1만 5천 명을 줄인 데 이어 지난해 자회사인 산요전기의 가전 부문을 중국에 매각하면서 3만 5천 명을 구조조정한 바 있다. 하지만 본사 인력까지 대규모로 줄인 것은 이번이 창사 이후 처음이다. 소니 역시 2008년 1만6천 명을 구조조정한 데 이어 지난달 초 1만 명을 더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파나소닉, 소니와 함께 세계 TV 시장을 석권했던 샤프는 지난해 3천760억 엔의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본사 지분의 9.9%를 대만 홍하이그룹에 넘겼고,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도 대만에 공장을 매각해 1만 4천 명의 감원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 전자 기업의 몰락은 복합적 요인으로 초래됐다. 제조업 경쟁력은 한국에 밀리고, 첨단 IT 분야 기술은 미국에 주도권을 뺏기면서 어정쩡한 상황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엔고와 동일본 대지진, 유럽발 재정 위기는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왜,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전기전자 업계가 '어정쩡한 상황'으로 내몰렸을까? 경제전문지 포천은 오만함과 시대 변화를 좇지 못한 부적응 탓이라고 꼬집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일본을 기술적으로 침몰시킨 것은 인터넷의 부상이었다고 분석했다. 일본 거대 기업들은 웹(web)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리더십을 보여주기는커녕 따라가기에 급급했고, 결국 참담한 몰락의 길을 자초했다. 일본 기업들에 최악의 적은 경쟁국의 도전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 전자 기업의 실상이 대구경북의 모습과 닮아있어 우려스럽다. 무엇이 닮았을까. 시대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는 오만함이 흡사하다. 우리 대구경북에서 1982년 5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구미에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ETRI의 전신)가 국내 최초로 인터넷을 개통한 날이다. IT 강국 대한민국이 바로 우리 지역에서 씨를 뿌렸다. 하지만 연구소는 대전으로 옮겨가 버렸고, 대구경북은 디지털 시대의 주변부로 남았다.

2004년에도 비슷한, 참담한 사태가 일어났다. LG필립스LCD 7세대 공장이 전통의 터전 구미가 아닌 경기도 파주로 갔다. 파주는 군사보호구역이어서 절대로 대규모 공장이 들어설 수 없다며 무사안일의 극치를 보여주던 지역 공무원들과, "경북의 일이 대구와 무슨 상관이냐?"며 헛소리를 내뱉던 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아픈 과거가 반복될 조짐도 보인다. 우리는 지금 산업화 시대를 지나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신라'가야'유교 문화의 본산인 대구경북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하지만 경북(대구) 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경주는 '재미없는 관광지'로 전락해 버렸다. 즐길 거리 없는 문화 도시 경주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국립정동극장의 미소2 '신국의 땅, 신라' 공연이 지난해부터 시작되어 국내외 관광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지만, 곧 중단될 위기를 맞고 있다. 2년간 시범 사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강원도 평창과 제주도에서 적극적 유치 활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던 것도 제대로 지킬 줄 몰랐던 어리석음을 또다시 되풀이라도 하겠다'는 듯 지금 지역사회와 언론은 '미소2'에 대해 별 무관심이다. 정말, 일본의 몰락이 남의 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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