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에 쫓겨 몸 숨긴 은적사
고려 태조 왕건은 대구와 인연이 깊다. 왕건이 대구 공산성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패퇴해 도주하는 과정에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대구 동구청에서 '팔공산 왕건 길'을 지정, 개방했다. 왕건 길은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출발해 동내동 동곡지에 이르는 코스로 동구의 북동 방향을 경유하는 푸른 소나무 길이다. 이른바 왕건의 스토리텔링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왕건과 관련해서는 팔공산 못지않게 앞산에도 다양한 전설이 남아 있다. 특히 앞산에는 왕건과 관련이 있는 사찰들이 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이다.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해 이들 사찰을 찾아 750여 년 전의 역사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은적사(隱跡寺)
앞산 큰골 자락에 있는 은적사는 서기 926년 신라 경애왕 3년에 창건된 고찰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은적사'라는 이름은 왕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몸을 숨겼다는 의미에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대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구원병과 대구에 온 왕건은 견훤의 공격에 팔공산 동화사 방면으로 가다 산기슭에서 견훤 군대에 포위당한다. 이에 왕건은 부하 신숭겸의 계책으로 탈출했다. 그 계책은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팔공산 중턱으로 가 신숭겸이 부하에 체포되는 순간 왕건이 탈출하는 것이었다.
탈출한 왕건은 굴에 숨자 왕거미가 출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의 추격병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왕건은 이 굴에서 사흘간 머물고 현재 안일암이 있는 곳에서 3개월 쉰 뒤 김천 황악산을 거쳐 철원으로 회군했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자신이 숨어 사흘간 보낸 굴이 있는 곳에다 당시의 고승 영도대사에 명해 숨을 은(隱), 자취 적(跡)을 사용해 은적사라고 이름을 붙이고 절을 짓게 했다. 이것이 은적사가 생긴 연유다.
◆왕굴(王窟)
왕건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은적사에 있는 석굴에 사흘간 몸을 숨겼다가 피신한 곳이 남구 대명동 비슬산(琵瑟山) 자락에 있는 굴이다. 견훤의 부대가 근처에까지 와서 왕건을 찾으려고 하자 갑자기 크지 않은 굴인데도 사람이 피신했는지 안 했는지 흔적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사히 그 견훤의 부대를 피해 고려 창업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왕건이 이 굴에서 쉬었다고 해서 '왕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안일사(安逸寺)
왕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안일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927년(신라 경순왕 1년) 영조(靈照)대사가 창건했다. 하지만 전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거나 파괴돼 창건 당시의 모습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백용성 스님이 중창한 것으로 대웅전, 해탈문, 종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구보해 선사에 의하면 안일사 명칭은 원래 유성사였다. 왕건이 이곳에서 3개월 동안 편안하게 있었다 해서 사찰 이름이 편안할 안(安), 평안할 일(逸)을 사용해 안일암(安逸庵)으로 바뀌었다. 이후 안일사로 규모가 커졌다.
◆임휴사(臨休寺)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임휴사라는 이름 역시 왕건과 연관이 있다. 왕건이 은적사와 안일사 등을 거쳐 하루를 쉬었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이 곳으로 와서 기도를 드리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아 쉬어 갔다는 것. 임휴사는 921년(신라 경명왕 5년)에 영조대사(靈照大師)가 창건하고 조선 순조 1년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하였으며, 그 후 300여 년 뒤 주지 포산화상(苞山和尙)이 복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대웅전은 2004년 화재로 소실되고 2008년 새롭게 준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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