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권력·섹스…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 친구처럼 지낼 순 없을까
한 중년 남성이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큰 목소리로 떠든다. "내 뉴욕 사업 파트너가 말이야…" 유명 사립대의 상징인 호랑이가 크게 그려진 모자를 쓰고, 미국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의 이름이 커다랗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스튜어디스를 붙잡고 묻는다. "그 회사 누구누구 부사장 알아요? 나하고 친한 사이인데…." 이 남성의 '진상짓'은 출입국기록카드 한 장에 무너진다. 'Male'(남성)과 'Female'(여성)을 구분 못해 30여 분을 쩔쩔매는 그가 얻은 건 '실소'뿐이다.
이 남성의 '진상짓'의 이면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과시욕망. 솔직해지자.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떠벌린 경험, 40대 이상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있다. 저자 말대로라면 "어쩌면 인간 남성은 인간 여성보다 침팬지 수컷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의 저서 '욕망해도 괜찮아'는 '욕망'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 사회와 개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먼저 자기 고백부터 시작한다. 자신에게는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다', '잘 난 척하고 싶다'는 뿌리깊은 욕망이 있단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욕망도 감춰져 있다. 누군가 아는 체를 하면 어색해 서둘러 자리를 피하지만, 정작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면 분노가 치솟고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겉으로는 규범이라는 '계(戒)'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욕망인 '색(色)'의 노예인 사람이다. 욕망을 평생 동행해야할 친구로 삼지 않고, 극복하거나 숨겨야할 적으로만 대해온 결과다.
다시 아까 그 남성 이야기. 고려대 모자와 하바드 티셔츠는 학벌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거대한 욕망의 핵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으로 욕망을 설명한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흉내내는 '모방욕망'이며 모방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모방을 강화한다.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고, 만장일치의 폭력을 가한다.
2007년 여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및 스캔들 사건이 전형적인 예다. 학벌'권력'섹스 등 모두가 욕망하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로 잘 버무려진 이 스캔들 앞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신정아 씨와 얽혔던 변양균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중년 남성들의 욕망을 보여준다. 중년 남성들은 규범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 섹스를 통해 분출했어야할 욕망을 표출하지 못한 그들은 겉은 멀쩡한 어른이지만 마음 깊은 곳 감성의 한 구석은 소년이다.
규범남 아저씨가 욕망을 배출하는 방식은 두 종류다. 육체적 사랑이라는 '일탈자'로 가거나 '남몰래 행복한 사람'들을 감시하며 돌을 던지는 '사냥꾼'의 모습이다. 두 모습은 일란성 쌍둥이나 마찬가지다. 저자는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과 공존 또는 화해해야한다고 말한다. 욕망은 B형바이러스와 같다. 바이러스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생 몸 안에 살지만 면역체계가 B형바이러스를 자각하고 공격하면 간 세포도 함께 손상을 입는다.
욕망과 화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고백'이다.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문화는 우리 사회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깨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312쪽. 1만3천500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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