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세이브는 승리를 따낼 수 있는 선발투수에 비해 잘 던지고도 아무런 기록을 챙기지 못한 구원투수를 배려하기 위해 도입됐다.
메이저리그가 시작된 지 100년이 훨씬 지나서 세이브제도가 탄생했으니 그동안은 얼마나 선발투수만을 편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경기가 완투로 이어졌으며 선발투수들의 대결에서 이미 승부가 좌우되어 선발투수보다 능력이 미흡한 투수들을 주로 마무리투수로 활용했다.
그러니 연봉이 선발투수에 비해 낮았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기약 없이 대기하는 피곤한 역할이라 서로가 기피하기 일쑤였고, 나이 든 투수들의 몫으로 남기도 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40%가 넘었던 완투율이 1970년대 들어서는 22%로 낮아지면서 현대야구의 투수운용체계에도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구단이 늘어나면서 팀별로 에이스급 선발투수들은 자원이 줄어들었고 손님을 그러모으는 이들 핵심 투수들의 선수 수명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자 부상방지와 투구수 조절 등의 보호조치가 절실해졌던 것이다.
더구나 1975년에 도입된 메이저리그 FA(자유계약선수)제도는 선수의 체계적인 관리가 최우선시되면서 중간계투와 마무리 부문의 연구도 본격적인 실험무대에 올랐다.
이후 1983년 토니 라루사 감독과 데이브 턴컨 투수코치가 화이트삭스에서 조우하면서 투수분업의 새로운 작품들이 쏟아졌고 원포인트 릴리프와 1이닝 클로져도 탄생하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의 변화는 즉각 전세계에 전파되어 불과 십수 년 만에 프로야구 투수운용의 틀을 오늘날과 같이 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탄생한 세이브의 역사는 홀드의 역사를 낳으면서 급격하게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선 돈이 문제였다.
1984년 다저스캠프 훈련에서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감지한 김영덕 감독은 권영호와 황규봉을 적임자라 판단했으나 마무리 보직에 대한 대우가 뚜렷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기라 두 투수는 완강히 고사했다.
원년 15승을 기록하며 나름 주전급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던 두 투수는 이제 핵심에서 떠밀려나는 자신들의 처지를 속상해하며 오히려 자리 고수를 호소했다.
구단에서도 아직 정착되지도 않은 이 제도에 선뜻 투자하기를 꺼렸다. 그만큼 국내 최초의 도입이었으니 구단이나 선수, 심지어 감독조차도 세이브의 가치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민 끝에 김 감독은 권영호 한 명만으로 낙점하고 전방위 설득에 나섰다. 당시 김 감독이 배운 마무리투수의 요건은 구위가 아주 빠르던가, 아니면 제구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권영호를 낙점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었다.
원년 자신이 몸담았던 OB와의 경기에서 5회 승리투수 일보 직전에 몸에 맞는 볼로 대응했던 권영호를 떠올리며 공격적인 성향이 적합한 마무리투수로 성격상 최적임자로 판단하였고, 또 당시 다저스캠프에서 권영호가 다저스 투수코치로부터 발렌슈엘라가 던지던 신무기를 전수받았기 때문이었다.
최종문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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